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묭롶 Nov 18. 2024

즐거운 나의 집.

27화. 위로.

민주는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스마트폰을 집어 들 시간을 확인했다.  

토요일 오전 열 시, 안방 침실 창문으로 내리쬐는 햇살은 밤 사이 내린 눈 때문인지 유난히 더 밝았다.  

나무꾼의 외투 벗기기 시합을 했다는 동화책 속 해님과 바람의 이야기에 나오는 햇살의 강도가 딱

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의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햇살이었다.  

느긋하게 침대에 누워 기지개를 켜던 민주는 순간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유심히 살피고는 낭패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정도면 오늘 배달이 안 오겠는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 쪽 의자 위에 놓인 카디건을 걸친 민주는 안방문을 열고 나와 거실로 어 나왔다.

오늘도 인기척 하나 없이 닫힌 방문을 바라본 그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냉장고를 열어 생수병의 뚜껑을 따서 들고 다시 안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선우가 그녀의 집에 오기 시작한 뒤로 그녀는 생수를 먹지 않았다.  언제나 끓여진 보리차나 옥수수차, 또는 작두콩 차가 준비되어 있었고 출근하는 그녀의 손에는 항상 보온병에 담긴 차가 들려졌다.  하지만 선우의

어머니가 소천한 이후로 그는 작동이 멈춘 기계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민주는 어쩔 수 없이 배달 음식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권하면 마지못해 먹지만 그냥 두면 넋을 놓고 자신만의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는 그였다.  


민주는 어떻게든 그에게 손을 내밀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을 일으켜 세웠던 사무엘처럼 그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사무엘처럼 다정하지도 요리를 잘하지도 그리고 착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고통의 정체를 알면서도 그 수렁에서 건져줄 수는 없는 막막한

아픔이 그가 웅크리고 있는 닫힌 문을 볼 때마다 묵직하게 그녀를 두들겼다.


오늘도 뻐근하게 욱신거리는 흉통을 느낀 그녀는 다시 일어나서 주방으로 향했다.  배달이 안된다면 흰 죽 정도는 끓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자 스마트폰으로 조리법을 확인한 뒤 그녀는 조리가 쉽다는 자신감을 획득했다.


하지만 막상 계량컵 단위로 되어 있는 재료의 양을 가늠하지 못한 그녀는 눈대중으로 냄비에 대충 씻은 쌀을 넣은 뒤 물을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언제 끓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내내 지켜보다가 그녀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냄비 안의 내용물이 끓어서 흘러넘쳤다.  


거품을 일으키며 맹렬히 넘치는 냄비를 보고 놀란 그녀는 급히 가스불을 끈 다음 냄비 안을 확인했다.  하지만 여전히 죽이라고 할 수 없는 내용물을 본 그녀는 물을 더 부은 뒤 다시 가스불을 켰다.  

잠시 후 이번에는 탄내가 나기 시작했다.  그제야 매일 아침마다 주방에서 냄비를 주걱으로 젓고 있던 선우의 모습이 떠오른 그녀는 죽이 저어줄 때를 놓쳐서 아랫부분이 눌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눌어붙은 죽을 개수대에 붓고 냄비를 씻은 그녀는 이번에는 쌀을 덜 넣고 물을 많이 넣은 다음 눈을 부릅뜨고 가열되는 냄비를 주시했다.  그런 뒤 쌀알이 떠오르기 시작하면서부터 계속 젓기 시작했다.

팔목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플 때쯤 죽의 상태는 도배를 할 때 쓰는 죽이 되어 있었다.


선우가 아침마다 해주던 죽은 분명 이런 상태가 아니었는데라는 절감이 밀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세상에 벌써 오후 한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 상태라면 선우를 먹이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마저 쫄쫄 굶다는 생각이 든 그녀는 처음으로 시도 요리를 포기하고 밖에 나가서 음식을 사 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눈길을 헤치고 나가서라도 식량을 구해오리라는 단단한 결심을 품은 그녀의 눈에 난장판이 된 주방이 보였다.

다시 한숨을 크게 쉰 그녀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안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꾸역꾸역 꿰입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현듯 사무엘이 그녀에게 해줬던 첫 번째 요리가 떠올랐다.   정신없이 하루 반을 꼬박 자고 일어난

그녀가 멍하게 창밖만 바라보고 있을 때 사무엘이 방으로 들고 왔던 토마토수프의 냄새는 맹렬한 허기를 일깨웠다.


 살고 싶지 않고 다 포기하고 싶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걸 먹기 위해서는 한걸음을 다가가야만 할 것 같았다.  내일 당장 모든 것이 없어진다 해도 일단은 그 수프를 먹고 싶은  마음은 생을 향한 본능적 집착과도 같았다.  그래서 선우에게도 그런 요리를 해주고 싶었다.  그가 내게 해줬던 요리들에 발뒤꿈치만큼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능력부족을 몸소 느끼고야 말았다.  


절로 한숨이 나와 다시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는 침대옆 협탁 서랍을 열어 그 안에 놓인 액자를 꺼내 들었다.

사진 속 그녀와 사무엘은 월스트리트의 명물인 황소 앞에 나란히 서서 웃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웃는 사무엘이었지만 그녀를 볼 때면 유난히 환하게 퍼지던 그 미소를 잊을 수 없는 그는 이제 그가 사랑했던 브런치 카페이자 자신의 집이었던 New York City , West street 185에 영원히 머무르게 되었다.






2019년 2월에 시작된 전미 영화협회의 파업은 추수감사절과 핼러윈 파티가 끝날 때까지도 타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여파는 영화사와 그 관계자 그리고 주주들에게 엄청난 손해를 입혔고 유니버셜에 1.3%의 지분을 갖고 있는 S&T의 부대표 마틴은 이로 인해 날마다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유니버셜의 주가 하락폭에 비례하여 분노조절지수가 떨어지는 마틴을 S&T 직원들은 미친개 피하듯이 피하기 시작했다.  


그날 아침도 딸의 성년식을 겸한 생일파티에 유명배우 제레미를  초청해 달라는 아내의 성화에 시달린 마틴은 출근할 때부터 일촉즉발 상태였다.


모두가 그런 마틴을 보며 고개를 자라목을 하고 있을 때 도드라지는 뒤통수가 있었으니 바로 영어 이름 앨리스 한이었다.   아침부터 숨 쉬는 모든 것이 거슬렸던 마틴의 시선이 그 뒤통수에 꽂혔다.  순식간에 주위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지만 민주는 의식하지 못한 채 보고서 작성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순간 S&T 직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는 침을 삼켰고 또 다른 가는 주먹을 꼭 쥐었다. 과연 미친개 마틴과 아이스(앨리스)한의 싸움의 승자는 누구인가?  











                    

이전 26화 즐거운 나의 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