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 박동기의 센서가 뚜----------하고 멈춘 순간 선우는 자신의 안에서 뭔가가 뚝하고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순간 그는 엄청난 공포가 몰려들어 눈앞이 캄캄해졌다. 세상과 자신을 연결시켜 주었던 가교가 끊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현실은 저 너머에 있고 자신은 그 까마득한 간극 앞에서 망연자실한 채 넋을 놓고 있었다. 당장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은 이 꿈을 깨어나야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깨지 못하는 꿈 속처럼 모호하기만 했다.
병실로 내려온 의사가 사망판정을 하고 병원 직원들이 영안실로 시신을 운구해 가기 위해 병실에 왔을 때도
그는 방전된 스마트폰처럼 먹통 상태였다. 그때까지도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는 그를 떼어놓으려는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병원직원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그의 곁에 있던 민주를 바라봤다. 그녀가 정신을 못 차리는 그의
눈을 마주 보며 여러 번 얘기한 뒤에야 시신을 옮길 수 있었다. 그녀는 당장 은행에 전화를 걸어 휴가를 신청했다. 일가친척과 지인이 없는 장례식장은 불 꺼진 상가처럼 적막했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선우는 허깨비 같았다. 그녀가 건네어주는 상복을 갈아입고 화장터에 가는 차 안에서도 그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누군가 전원을 내려버린 것처럼 눈동자가 텅 빈 선우를 보며 그녀는 미국에서 몸만 겨우 빠져나와 사무엘을 만났을 때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한 학기 남은 법대를 포기하고 도망쳐 나온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야 했는지 회의가 들었다. 아무리 열심히 죽을힘을 다해도 결국은 제자리라는 생각은 그녀에게서 살아갈 이유를 빼앗았다.
멍하게 앉아 창밖만 하루종일 지켜보는 그녀에게 다가온 사무엘이 아래층에서 함께 영화를 보자고 권했을 때 그녀는 기계적으로 일어나 그를 뒤따라갔다.
사무엘이 그날 보여준 영화는 쇼생크 탈출이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은 채 투옥된 남자가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탈옥에 성공하는 영화를 보던 그녀는 영화 속 주인공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하수도를 빠져나온 뒤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내지르는 환호의 함성을 듣는 순간 불 꺼진 자신의 마음속에 스미는 희미한 빛을 느꼈다.
'어쩌면 이게 끝이 아닐지도 몰라.'
그녀는 그날로 영화 쇼생크 탈출 주인공의 직업이었던 세무사(EA)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무사 자격을 획득한 뒤 곧바로 세무법인 회사인 S&T에 입사했다. 하버드 법대 본과 과정을 한 학기만 남겨놓았을 뿐 거의 전 과정의 과목을 수료했던 그녀는 세법에 능통했고 현업에 연방법과 각 주가 정립한 자치법을 적재적소에 이용함으로써 상사의 신임을 얻었다. 회사 내에서 승승장구하던 그녀는 일이 잘 풀릴 때마다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무엘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만의 지옥에 떨어져 있는 선우를 외면할 수 없었다.
화장터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그래서 선우의 통곡은 더 처절했다. 선우는 화장장의 불길에 어머니가 아니라 그 자신을 태우는 것처럼 온몸으로 통곡했다. 민주는 그 모습을 보면서 무력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고통에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다. 그 슬픔과 고통을 온전히 겪어야만 다음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기에 그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장례를 치른 후에도 선우는 정신을 놓은 사람 같았다. 그동안 어머니의 병실에서 함께 생활했던 그는 당장
갈 곳이 없었다. 그의 부동산 사무실 임차료를 그녀가 받게 해 줬지만 당장 지낼 곳을 알아볼 만한 여력이 없어 보이는 그를 그녀는 자신의 사택으로 데려왔다.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고치를 지은 나방처럼 어둠 속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그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 그녀는 그의 어머니를 모신 서울 추모공원으로 향했다.
대소사에 경험이 없는 그녀였지만 그의 어머니에게 제대로 된 예의로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에 그녀는 탈상을 겸한 삼우제를 지내기 위해 납골묘를 찾았다.
선우를 앞세워 추모공원 입구를 들어선 그녀가 계단을 올라가 이층 입구에 들어섰을 때 그녀의 눈에 창가 쪽에 서서 유골함에 시선을 둔 민선의 모습이 보였다. 민선은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크게 울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녀와 함께였던 시간 동안 민선이 우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발목 절단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민선은 주먹을 꾹 말아 쥐고 참아냈다.
'유골함에 있는 사람이 누구길래 민선이 저 정도로 우는 것일까?'
추모공원의 바깥은 세찬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추모공원의 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햇살은 바람의 흔적 한점 없이 온화했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에 반사된 유골함이 하얗게 빛이 났다. 그 눈부심만큼이나 유골함 주인은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이키의 빛나는 눈망울을 쏙 빼닮은 승호의 눈을 볼 때마다 가슴 한편에서 피어오르는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생일을 이틀 앞두고 자신의 눈앞에서 사고를 당한 마이키의 모습이 승호의 웃는 모습을 볼 때면 불현듯 재생되고는 했다.
'마치 넌 행복해선 안된다고 누군가가 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민선은 스물세 살에서 더 나이 먹지 않는 사진 속 마이키를 보면서 주먹으로 제 가슴을 쳐가며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돌아올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날. 내가 마이키에게 그런 부탁만 안 했어도...'
라는 후회는 떨치려야 떨쳐버릴 수 없는 주홍글씨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낙인찍혔다.
'마이키 미안해.. 승호한테는 차마 말할 수가 없어. 엄마를 죽게 만든 사람이 나라고 어떻게 말해.
아냐. 승호는 내 아들이야. 아냐.. 미안해.. 아냐... '
가슴을 치며 몸부림치는 민선의 모습을 본 민주는 한참 동안이나 걸음을 옮기지 못한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