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 미친개의 눈에 띈 앨리스(직원들 명 아이스)는 날개를 달았다. 미친개 마틴은 자신의 눈에 유난히 거슬리는 뒤통수를 향해 걸어갔다. 마틴이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한참을 곁에 서 있는데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민주가 모니터를 향해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려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시선에서
'왜?'냐는 뜻을 읽어낸 마틴의 혈압이 급상승했다.
그래서 그는 앞, 뒤를 다 잘라내고 질문으로 선제공격을 날렸다.
미친개의 질문 : "거참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과연 회사 이익에도 도움이 되고 있는 건가?
월급값은 하냐 이 말이야."
마틴의 말에 지레 겁을 먹은 사무실 직원들은 더욱 자라목이 되어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마틴의 질문을 들은 민주는 그 자리에 굳은 것처럼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민주는 그 순간 치열하게 갈등하고 있었다.
"절대 눈에 띄면 안 돼. 뉴욕 가브리엘에 가서 사무엘을 찾아."
S&T에 입사한 뒤 그녀는 보수적으로 일했다. 실력을 드러낼 기회는 많았지만 매번 십 년 전 김원장이 다급하게 전화로 했던 말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무려 십 년이 지났다는 생각이 든 그녀는 그의 질문에 즉답 대신 자신의 책상 서랍을 열어서 그 안에 있던 파일철 하나를 꺼내서 마틴에게 건넸다. 엉겁결에 파일철을 받아 든 그의 당황한 시선이 의자에 앉아 있는 민주에게로 향했다. 의자에서 일어선 그녀는 당황에 이어 의아함으로 변한 마틴의 얼굴을 보며 자신의 안경을 손가락으로 추켜 올렸다.
"들어가셔서 읽어보시고 궁금하신 거 있으시면 인터폰 하세요."
말을 마친 민주는 마틴을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여 인사를 하고는 다시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보며 시트에 자료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사무실 전 직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확인한 마틴은 파일철을 들고 자신의 사무실로 들아가 책상 위에 파일철을 내리치듯이 던지고는 의자에 앉아 목을 조르는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겨 느슨하게 만들었다.
아침부터 직원들 앞에서 이 무슨 망신인가 싶은 생각과 더불어 자신 앞에서 알아서 기지 않는 직원의 태도가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대충 비빈 그가 눈을 떴을 때 그 건방진 직원이 건넨 파일철이 눈에 띄었다. 파일철 표지를 열어 그 안의 내용을 읽어가던 그의 동공이 순식간에 확장되었다. 파일철을 손에 들고 눈을 떼지 못한 채 다음장을 넘기던 그는 곧바로 인터폰으로 앨리스 한을 호출했다.
영화사 유니버셜은 부대표인 마틴이 투자를 한 회사이면서 동시에 S&T의 큰 고객이었다. 유니버셜이 처한 위기는 곧 부대표인 마틴의 손해인 동시에 S&T의 수익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전미영화협회의 오랜 파업으로 진행 중이던 영화제작이 엎어진 건들이 다수였고 다 찍어놓은 영화도 후반작업을 하지 못해서 개봉을 못하는 등 이미 여름 특수와 부활절 특수를 놓치고 당장 가장 중요한 크리스마스에 개봉할 영화도 없는 영화계 전반은 파산직전의 위기가 감돌았다.
민주는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면서 자신이 진행 중인 프로젝트와는 별도로 이 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연구하고 있었다. 먼저 그녀는 영화산업과 관련해서 등록되는 신기술 특허권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에서 신규 등록한 3D 기술에 대한 특허권을 확인했고 해당 회사 관계자와의 접촉을 통해 기존 제작영상에 대한 3D전환 가능성과 비용에 대해 구체적인 금액과 샘플 영상을 확보할 수 있었다.
기존 아이맥스 영화의 저품질의 화질과는 달리 영상의 품질을 확보하면서 3D입체감이 선사하는 몰입감을
제공한다면 과거 기록적 흥행을 불러왔던 작품을 리마스터링 해서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선 그녀는 자신의 조사 내용을 PPT로 만들었다.
마틴이 굳이 도발하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책상서랍에서 사장됐을 계획은 이제 그녀의 손을 떠났다. 마틴이 인터폰을 하자 그녀는 곧바로 일어서서 부대표실로 향했다.
그녀가 부대표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자리에 앉아 있던 마틴이 일어서서 그녀에게 의자를 권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건방진직원이 아니라 자신과 S&T를 구원할 구원자였다. 그녀를 보는 마틴은 목이 마르지 않았지만 목이 타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의 목소리는 살짝 갈라져 있었다.
-"아니. 이런 게 있었으면 진즉 가져왔어야지. 어떻게 구체적으로 생각해 놓은 작품은 있고?"
"유니버셜의 최대 흥행작 주라기공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묻기가 무섭게 바로 답을 하는 민주를 보며 마틴은 믿음직스럽다는 생각에 절로 흡족해졌다.
-"크리스마스 개봉이 가능하단 말이지?"
"네. 이미 테스트 영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부대표님 이메일로 전송할 테니 직접 확인하십시오."
-"보니까 배급을 조지아주에 있는 유니버설 법인으로 해놓았던데 그건 왜인가?"
"조지아주 세법에 작년도 매출액의 20% 이상 감소를 겪은 법인에 대해 당해연도 매출액에 대한 주세를 10% 감면해 주는 법안이 있습니다. 그러니 세액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조지아주로 매출신고를 해야죠."
그녀의 말을 들은 마틴은 절로 손뼉을 마주치며 크게 웃었다. 이렇게 기가 막히게 가려운 곳을 알아서 긁어주는 쾌감을 오랜만에 느낀 그는 하마터면 민주를 얼싸안을 뻔했다. 민주는 그렇게 S&T에서 마틴의 사람이
되었고 크리스마스 시즌 리마스터링 3D로 재개봉한 주라기공원은 전미 흥행의 새 역사를 써 내려갔다.
금요일 오전 근무를 마친 민주는 사무엘과 자신이 작업한 영화 주라기공원을 보기로 했다. 노트북 전원을 끄고 서랍을 잠근 뒤 가방을 들고 일어선 민주는 서둘러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지하철에서 내린 그녀가 지하철 출구에서 오분 거리에 있는 사무엘의 가게이자 집인 가브리엘을 향해 오르막을 열심히 올라 허리를 숙여 거친 숨을 뱉어 내쉰 뒤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순간 그녀의 눈에 익숙했던 거리 풍경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에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사무엘이 보였고 그 뒤를 이어 그 맞은편에 있는 경찰 두 명이 보였다. 사무엘의 얼굴은 그녀가 그를 만난 뒤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낯선 표정으로 굳어 있었고 그의 종아리 옆에 쓰러져 있는 중년의 백인 여성이 보였다. 주변의 소음이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고 삐아는 이명만 울리는 가운데 그 와중에도 민주의 모습을 본 사무엘이 놀란 그녀를 안심이라도 시키려는 듯 올리고 있던 손을 살짝 내려 괜찮다는 손짓을 하려고 했다. 그 순간 총성이 울렸다. '탕'
그 자리에서 바닥에 주저앉았던 민주는 벌떡 일어나 앞으로 달려 나갔다. 쓰러진 사무엘의 주머니에는 곁에 쓰러진 백인 여성에게 주려고 했던 사탕의 비닐이 비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저혈당 쇼크로 쓰러진 백인 여성에게 다가가 급하게 사탕을 주려던 사무엘은 그 자리에서 그를 범죄자로 오인한 경찰의 과잉진압에 의해 현장에서 즉사했다.
사무엘을 잃고 난 뒤 그녀는 계속 그날의 총성이 들려왔다. '탕'하고 발사된 경찰의 총탄은 사무엘을 죽이고 또 동시에 그녀도 죽였다. 사무엘이 죽고 난 뒤에도 여기저기서 총기로 인한 사망사고는 날마다 계속되었고 그녀는 매 순간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총소리를 피해 정신과를 다니기 시작했지만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총기가 없는 한국으로 되돌아가기로 하고 S&T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끝까지 퇴직하려는 그녀를 설득했던 마틴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IMF 자문 위원으로 나가있을 때 한국에서의 인맥을 동원해서 대한은행에 추천서를 써주었다.
민주는 사무엘의 유골을 한국으로 가져오고 싶었지만 사무엘에게 고향과 같은 가브리엘에 그를 안장하는 것이 그를 위하는 길이라는 생각에 브런치 카페 가브리엘을 허물고 그곳에 사무엘을 수목장 했다.
그리고 그 앞에 큰 비석을 세웠다.
'여기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세상을 떠난 천사 사무엘 잠들다.'
브런치 카페 가브리엘이 있던 New York City, West Street 185에 있는 사무엘의 무덤은 여전히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꽃을 놓고 갔다. 이제는 카페 대신 비석 뒤에 서 있는 큰 나무 아래서 사무엘은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을 꾸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