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네시, 새벽을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히고 시작된 마장동 도축단지의 하루가 저물어 가는 그 시간 작업실 청소와 위생용품과 각종 도구의 정리를 마친 뒤 옷을 갈아입은 민선이 사무실 건물로 걸어 나왔다.
후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선 그녀의 눈에 오늘도 같은 자리에 걸린 정물화 같은 풍경이 들어왔다.
봄이 되어 벚꽃 잎이 흩날리든 여름이 되어 매미가 귀가 울릴 정도로 울어대든 가을이 되어 나뭇잎이 떨어지든 겨울이 되어 눈송이가 떨어지든 바깥 배경만 바뀔 뿐 하루의 작업이 끝난 뒤 박 씨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한 손에 믹스커피가 든 종이컵을 든 채 무심하게 바깥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녀가 박 씨를 처음 만날 날로부터 십 년이 지나도록 그는 한결같았다. 마치 책장을 넘겨서 1페이지라는 표기를 보고 다음 페이지를 넘겼는 데 다시 1 페이지고 또 그다음 페이지도, 그다음도 또 다시 1페이지인 책처럼 그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같을 것만 같았다.
한때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에 대한 궁금증이 들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럴 때면 민선은 자신의 심란했던 과거가 떠올라 이내 머릿속에서 궁금증을 지워버리곤 했다.
'나 하나 살기도 힘든 세상에 누가 누굴 궁금해해.'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자신이 그의 뒷모습을 볼 수 있듯이 하루를 마친 뒤 그에게 인사를 하고 출입구를 빠져나가는 자신의 뒷모습을 그가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평소의 그녀라면 그대로 그녀의 인사에도 고개도 돌리지 않을 그의 뒷모습에 인사를 건넨 뒤 퇴근을 했겠지만
해야 할 말이 있었던 그녀는 그대로 말없이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이내 시선을 느낀 박 씨가 고개를 돌려 표정 없는 평소의 얼굴로 민선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제야 그녀는 그의 시선에 왠지 모를 기분이 들어 두 손을 마주쥔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내일 휴가를 써야 해서요."
그녀의 말을 들은 박 씨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하던 시선을 돌려 벽에 걸린 달력을 보았다.
'그 아이, 기일이군.'
달력을 향했던 그의 시선이 다시 민선에게 향했다.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한 그는 잠시 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몸을 돌려 창밖을 응시하는 박 씨의 등을 향해 인사를 건넨 민선이 빠른 걸음으로 출입구를 빠져나와 주차장 한 편에 세워진 자신의 오토바이로 향했다.
박 씨의 시선은 민선이 오토바이로 걸어가서 자신의 짧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훌훌 턴 뒤 헬맷을 쓰고 오토바이에 올라타 시동을 건 뒤 부르릉 소리를 내며 큰길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는 그때까지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진 그 순간 박 씨는 낮은 한숨을 조용히 내뱉었다. 그의 얼굴에 잠시잠깐 착잡한 표정이 어렸다가 금세 사라졌다.
엄마가 은행으로 찾아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선우의 전화를 받기 전 청원경찰이 그녀에게 한 통의 등기 우편을 가져왔다.
[발신: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대로 73번 길 70, 도시계획부 김인철 주무관]
발신인을 확인한 그녀는 동봉된 봉투를 뜯고선 내용물을 읽어보았다.
[제목: 퇴거 연장 불가의 건]
서류는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이 거주하고 있는 독산동 주택에 대해 민선이 구청에 제출한 퇴거일 연장 신청에 대한 불허 통보문이었다. 독산동 집이 그녀와 어머니의 공동명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안내문도 어머니와 그녀에게 각각 발송된 것으로 보였다. 아마도 독산동 집의 보상금으로 이사할 곳을 알아보던 민선이 시간에 쫓기다 못해 구청에 연장신청을 한 것으로 짐작이 되었지만 은행을 찾아온 엄마에 반갑지 않은 소식까지 접한 민주는 머리가 무거워졌다.
머릿속이 자책과 죄책감 그리고 그 감정들과 동반돼서 손을 잡고 찾아오는 여러 복잡한 생각들로 술렁일 때
선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공사장비가 주변을 말끔히 밀어버려 엄마집만 남아 있는 집 인근에 오토바이를 세운 민선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방안에 있다가 문 여는 소리를 듣고 나온 승호가 대번에 달려 나와 민선에게 안겼다.
보통키는 넘고 운동을 했던 민선이지만 또래보다 체격이 좋은 승호가 답삭 안겨오니 그녀의 몸이 잠깐 뒤로 기우뚱해졌다. 뒤로 무게중심이 향한 민선을 다시 앞으로 잡아 끈 승호가 그녀의 귀에 소곤소곤 말을 전했다.
"함미. 아파."
엄마가 편찮으시다는 아이의 말에 놀란 민선이 큰 목소리로 물으려 하자 그녀의 입을 손으로 덥석 막은 승호가 그녀를 조용히 주방 한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런 승호에게 민선이 '왜'냐는 입모양을 했다. 그러자 손가락으로 '쉿'표시를 한 승호가 다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는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봤던 그 이모 있지. 함미 거기 갔데, 다녀와서 누워 있어. 병원 가자니까 싫데."
승호에게서 엄마가 아픈 이유를 들은 민선은 순간 버럭 화가 치밀어 말리는 승호를 뿌리치고는 안방문을
냅따 잡아당겼다.
"거길 왜 가? 어? 왜 가냐고? 가면 좋아해? 엄마.. 진짜 왜 그래."
눈에 불길이 치솟는지 치솟는 불을 끄기 위해선지 눈물이 차올랐다. 눈물에 가린 그녀의 눈에 불도 켜지 않은 어둑신한 방에 이불을 뒤집어쓴 조그마한 몸체가 보였다. 그 왜소함에 다시 화가 난 그녀는 방문을 닫던 손에 힘을 줄여 방문을 다시 조심히 닫고는 주방에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한숨을 내쉬는 그녀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이 가득한 승호가 물컵에 물을 따라서 건넸다.
"엄마. 함미한테 그러지 마."
순간 무릎을 굽힌 채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승호의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던 마이키의 눈동자와 겹쳐 보였다.
"나. 써니 좋아."
보호시설에서 그녀가 나에게 처음 말을 건네던 그날 저렇게 조심스러운 눈길로 날 보던 마이키는 내가 좋다고 했다.
'그런데 난.... 난...... 난......'
갑자기 울음이 터진 엄마에 당황한 승호는 어찌할 줄 몰라 안절부절하다가 엄마가 그대로 부서져버릴까봐 그녀를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선우의 어머니는 췌장암 말기 판정의 경우 대부분 육 개월을 넘기기 어렵다는 의사의 판정보다 삼 개월을 더 살았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의료보험도 되지 않는 신약과 새로운 항암 요법이 된다는 곳을 찾아다니느라 엄마와 자신이 살던 집을 팔았다. 그 집을 판 돈으로 얻은 부동산 사무실을 민주가 되찾아주자마자 엄마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병실로 내려온 담당의로부터 24시간 이내 임종하실 거라는 얘길 들은 선우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겨우 민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지금 그녀라면 그의 손을 잡아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머릿속으로는 자신이 빨리 정신을 차려서 엄마의 마지막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그냥 어머니 침상 곁에 앉아 어머니의 손만 잡고 있었다. 그 손을 놓치면 이제 정말 어머니를 놓칠 것만 같아서 그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전화를 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도 가늠이 되지 않는 병실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호스피스 병동에 있는 시간 동안 그 병동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어서 떠나갔다. 환자가 죽고 의사가
사망선고를 한 뒤 시신이 영안실로 안치되기 위해 이동할 때 보호자들의 표정은 짙은 슬픔 속에 희미한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어머니의 병실을 올 때마다 그를 병실문 앞에서 붙잡던 감정의 정체를 그는 모르지 않았다.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진 상황에서 그 지난한 고통의 시간을 경제적 부담과 함께 견뎌야 한다는 불안감과 어차피 돌아가실 수밖에 없는 결론이라면 차라리 그 시간이 짧기를 바라는 그 죄스러운 마음이 언제나
그를 옭아맸다.
병실로 들어온 민주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선우의 참혹한 눈빛 속에서 자신을 보았다.
'이 사람과 나는 같은 지옥을 사는구나.'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잡는 민주의 온기를 느낀 선우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봤을 때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