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열 시 십 분을 확인한 그녀는 삼십 분 뒤 도착 예정인 은행장을 떠올리며 인터폰 수화기를 다시 귀에 가져다 대었다.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 그녀는 지점장실을 나와서 청원경찰과 데스크 쪽에 은행장 방문 사실을 알린 뒤 다시 지점장실로 들어가서 옷걸이에 걸어 놓은 재킷을 걸친 후 복장을 점검한 다음 청원경찰과 함께 은행 출입문으로 나갔다.
짧은 가을을 지나 초겨울로 접어드는 차가운 바람이 정면의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들이쳐서 그녀의 머리칼을 흩뜨려 놓았다. 손가락을 머리칼 사이에 넣어 대충 수습을 하던 민주의 눈에 은행 입구 모서리 오른쪽 인도에 서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휠체어를 탄 왜소한 체격에 백발로 센 머리칼을 한데 묶은 할머니가 그녀의 눈에 들어온 순간 그녀는 눈을 다시 부릅뜬 채 다시 확인하기라도 하듯 할머니가 있던 곳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런 그녀와 할머니가 눈이 마주친 순간 할머니는 당황한 듯 전동 휠체어를 다급히 조작해서 은행의 모서리 뒤쪽으로 돌아가 버렸다. 다급히 사라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민주를 보고 그녀의 곁에 서 있던
청원경찰이 아는 척을 했다.
-"어.. 저 할머니 오늘 또 오셨네."
청원경찰의 말을 들은 민주는 다급히 그를 붙들고 그에게 되물었다.
"또 라뇨?"
자신에게 되묻는 지점장이 이상했지만 은행 지점장이니 관리 차원에서 염려하는 거라 생각했던 청원경찰이
할머니를 두둔하듯 말했다.
-"특별히 나쁜 짓을 하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아니고 지난달부터 간혹 와서는 한참이나 저쪽 모서리에서
가만히 한참 동안 은행만 보던데요. 나쁜 사람 같진 않고 아픈 사람 같아요."
청원경찰의 말을 듣는 그녀의 귓가에 동생인 민주가 자신을 찾아왔던 날 마지못해 꺼냈던 말이 들려왔다.
-"그러지 말고 엄마는 한 번 보러 와라."
귓가에 들리는 동생의 음성과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붙박이처럼 서서 은행 출입문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늙은 엄마의 모습이 겹쳐지자 그녀는 얼굴로 열이 올라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런 그녀가 이상한지 청원경찰이 그녀에게 다가가려 할 때 은행 입구에 검은색 관용 차량이 도착했다.
도착한 차량을 확인한 민주는 빨리 자신을 수습한 뒤 운전기사가 열어주는 뒷좌석 문으로 나오는 은행장에게 고개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은행장님."
차에서 내린 은행장은 호탕하게 웃은 뒤 인사를 건네는 민주를 일별 한 뒤 앞장서서 은행 출입문을 거쳐 지점장실로 향했다. 이내 다급히 뒤따라온 민주가 권한 회의의자에 앉은 은행장은 그녀에게도 의자를 권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은행장은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원래는 자네를 본점으로 불렀어야 하는데 내가 기다릴 수가 있어야 말이지.
유아이 건설 주거래 은행 맡았다면서.
자네는 정말 우리 대한은행의 보배야. 보배."
은행장이 흐뭇한 표정으로 민주를 치하할 때 청원경찰이 준비된 차를 들고 지점장실 문을 열었다.
그 모습을 본 은행장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만류했다.
-"아냐. 창구직원들 바쁘고 그런데 내가 폐를 끼칠 수 있나. 난 그저 자네 칭찬하고 싶은 맘이
급했네. 업무 보게. 나오지 말고. 응.. 이번건은 따로 술자리 한 번 하지..
아참 자네 위스키 좋아하지.. 그래.. 응. 나... 가네.."
민주가 제대로 된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은행장은 왔다가 혼자 칭찬하고 혼자 기쁘고 혼자 들떴다가 혼자 일방적으로 술자리를 약속한 뒤 구십 도로 배웅하는 직원들의 환대를 받은 뒤 본점으로 돌아갔다.
은행장이 돌아간 뒤 민주는 지점장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길모퉁이에 서 있던 엄마의 모습이 눈앞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분명히 싫어서 도망쳤고 나중에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멀리했고 그런 뒤에는 그냥 잊고 싶었던 과거의 그림자는 여전히 그녀에게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단단한 땅을 딛고 있는 줄 알았는데 눈을 떠보니 늪 한가운데 빠져 있는 것처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고 같은 곳을 맴도는 꿈처럼 그녀는 과거로부터 도망치고 있었지만 현실은 미래가 아닌 과거로의 도돌이표라는 깨달음이 깊은 좌절감으로 다가와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그녀를 현실로 호출하기라도 하듯 책상 위에 놓인 그녀의 스마트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선우 씨' 폰 화면에 표시된 발신인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의아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평소 그는 그녀에게 전할 말이나 묻고 싶은 게 있을 때는 업무 중인 그녀를 배려해서 항상 문자를 이용했다.
그런데 한참 업무가 바쁠 시간에 전화를 걸 리가 없는 사람이 전화를 했다는 사실이 무기력해져 있던 그녀에게 전화를 받게 만들었다.
"선우 씨. 무슨 일 있어요?"
억지로 목소리를 짜내어 그에게 물었지만 선우는 답이 없었다.
말소리 대신 병원의 일상적인 소음이 들려왔다.
순간 그녀는 누가 말해주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예감이 들었다.
숨을 죽인 채 그녀가 말이 없는 선우를 의식하고 있을 때 지독히도 작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한데 혹시 지금 병원으로 와 줄 수 있으세요?"
선우의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병실 앞에서 민주는 숨을 골랐다. 병실로 나 있는 창으로 병실 내부를 볼 수 있었지만 마음이 무거워 선뜻 그 안을 볼 수가 없었다. 말없이 문 앞에 서 있던 민주의 머릿속으로 선우의 어머니를 처음 만났던 날의 병실 풍경이 펼쳐졌다. 병실에 있는 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햇살에 반사되어 하얗게 눈부시던 병실 침구의 시트와 그 아래 위치한 아주 자그마한 몸피.......
이미 고통으로 파 먹혀 조그맣게 쪼그라들어버린 아주 작은 몸피와 머리에 쓴 모직 두건과 뼈만 남은 손...
선우 씨가 어떻게 얘길 했는지 이 주 전에 면회를 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들릴 듯 말듯한 미약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주 연한 물감으로 채색하여 금방이라도 햇살에 발화되어 버릴 것만 같은 그 미소가 떠올라서 그녀는 차마 병실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