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talk about running
2019.05
운동 삼아 달리고, 달리는 것을 즐거워한다. 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 많게는 네 번 10km씩 뛴다. 뛰어야겠다고 처음 마음먹었던 것은 2013년 3월부터다. 당시에는 순전히 체중 감량을 위해 달렸다. 달리는 일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2016년 4월 즈음이다. 군대에서 신물 나도록 뜀걸음을 했지만 나는 그와 상관없이 계속 달리고 싶었다. 이제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달려왔기에, 뛰는 일은 나의 중요한 일부분이 되어버렸다. 여행이라도 가서 오랫동안 달리지 않으면 옆구리에 살이 붙는듯한 느낌이 든다. 조금 무리해서 무릎이 삐걱대는 날에는 이러다 영영 달리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걱정하기도 한다. 그 정도로 달리는 것이 좋다. 취미를 물어도 책과 영화와 달리기를 말한다. 그럼 가끔씩 하루키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는다. 하루키를 (정말) 좋아한다. 나는 높은 확률로 그렇게 물어봐 주는 사람들도 좋아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 중 내게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를 읽어보았냐고 물었던 친구가 있었다. 난 그를 달리기보다 더 좋아하게 되었다.
지난 목요일은 나의 달리기 인생에서 특별한 날이었다. 회사가 스폰서 해주는 5.6km(3.5mile) 마라톤 대회에 출전했기 때문이다. 트레드밀 위가 아닌 바깥에서 뛰는 것도 오랜만이었고, 마라톤 대회에 나간 것은 거의 20년 만이었다. 가장 최근의 달리기 대회는 울면서 아버지 바짓가랑이를 잡고 뛰었던 YMCA 아기 스포츠단 시절의 일이었다. 5.6km는 기록을 재기에 애매한 거리였지만 나는 28분에서 30분 사이에 들어오기로 마음먹었다. 10km를 50분 내에 주파하는 것이 장거리 달리기를 하기 위한 첫 관문이라고 들었다. 첫술에 배부르랴 생각하고 시간을 살짝 넉넉하게 잡았는데도 대회 시작 시간이 가까워지자 긴장감에 무릎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출발 신호가 떨어지고 5분 정도는 뛰는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호흡이 터지지 않아 숨 쉬는 것이 불편했다. 무엇보다 나의 속도를 알 수 없어서 불안했다. 화면에 찍혀 있는 속도에 맞춰 일정하게, 소모되는 칼로리를 확인해가며 달리는 일이 너무 익숙했다. 지금 오버페이스 하는 것은 아닌지, 시간에 맞춰 들어오려면 누구를 러닝메이트로 삼고 뛰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달리다가 몸이 먼저 안정감을 찾았다. 어느새 호흡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곧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며 달리게 되었다. 기록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달리면 생각들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때부터 달리는 것이 즐거워졌다. 야외에서 달리는 것은 트레드밀에서 뛰는 것보다 배로 더 재미있었다. 고무벨트가 돌아가는 속도에 맞출 필요 없이 내가 원하면 더 빠르게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내 몸 또한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손등과 팔꿈치가 바람에 젖어갔고, 상체를 앞으로 숙이면 속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도시의 풍경들이 나를 지루하지 않게끔 해주었다.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먼저 달리던 사람을 제치고 앞서나가는 재미도 있었다. 그리고 편했다. 트레드밀 위에서 제자리를 지키며 달리는 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일인지 체감할 수 있었다. 달릴 때는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말 그대로 자연스러웠다. 몸에 부담이 덜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리다가 호흡이 살짝 가빠질 즈음에 도착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힘을 내어 도착선을 밟고는 두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계획에는 없던 행동이었다. 몹시 즐거웠다. 완주 시간은 29분 31초. 기록에 대한 생각을 지우고 달린 것이라서 놀랐다. 앞서 출발한 그룹의 걷는 이들을 피해 다니느냐 느려진 시간을 생각하면 더 빨리도 들어왔을 수 있을 것 같았다. 10k-50m의 벽이 뛰어넘을 수 있는 장애물 정도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삶에는 새로운 출발선이 생기게 되었다. 벌써부터 다가오는 대회들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더 오랫동안 달리기 위해 무릎 건강에도 신경 쓰기 시작했다. 마라톤의 즐거움을 확인한 것만큼이나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 좋다. 관성에 따라 사는 것은 결국 어떤 가능성들을 닫아버리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새로운 길 위에는 땀을 식혀주는 바람이 있고 기쁨의 탄성을 자아내는 시원한 맥주도 있으며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도 존재한다.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이것이 지금의 내가 달리기를 말할 때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