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18
2018.01
경춘선 열차를 타고 서울을 오고 간지 햇수로는 벌써 5년이 흘렀다. 서울 어느 한복판에서 나를 만나기로 했다면, 적어도 약속시간 한 시간 반 전에는 옥색 열차의 2-3칸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서울로 가는 방법이 한 가지뿐인 것은 아니다.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다면 그보다 가치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아버지는 itx와 고속버스를 자주 이용하신다. 아들은 지하철을 고집한다. 자주 오가기엔 교통비가 부담이 될뿐더러, 경춘선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그다지 아깝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경춘선에는 경춘선만의 낭만이 있다. 자주 생각하게 되는 역들만 몇몇 떠올려 본다.
남춘천역에서 여정은 시작된다. 집에서 역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거리다. 경춘선 열차도, 남춘천행 시내버스도 배차 간격이 크다. 간신히 지하철 시간에 맞출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해 2~30분간 다음 열차를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춘천역에서 출발하는 열차에는 아직 사람들이 많지 않다. 지하철 문과 가까운 자리, 오른쪽 제일 끝에 앉으면 열차는 왼쪽으로 서서히 출발한다.
김유정역에서 문명은 끝난다. 정확하게는 ‘끝나고는 했다’가 맞을 것이다. 김유정역에서 열차가 출발하고 터널을 지나기 시작하면 지하철 내에서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았다. 주요 통신사 셋 모두 그랬었다. 아마도 구불구불한 산길들과 많은 터널들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뉴스나 페이스북을 탐독하던 나도 김유정역에 다다르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가방에서 책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데이터를 소진할 필요까지 있나 싶었다. 그렇기에 내 책 읽는 습관의 일등공신은 걸출한 작가들보다는 강원도와 경기도의 수많은 산과 터널들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태백산맥]의 전권을 다 읽은 것도, [노자와 21세기]를 마친 것도 바로 지하철 안에서였다. 안타깝게도(?) 기술은 계속 진보하여 이제는 경춘선 전역에서 끊김 없는 인터넷 접속이 가능해졌다. 편리하다고 느끼기는 하지만 익숙하던 무언가의 사라짐이 아쉽기도 하다.
굴봉산역은 산과 산 사이에 위치해 있다. 지하철 문이 열리면 가끔씩 폭포소리 비슷한 것이 난다. 여름이면 매미들이 울곤 하는데 그 수가 원체 많다 보니 매앰-매앰이 아닌 커다란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를 내는 것이다. 물론 초록이 흐드러지는 계절만의 일이다.
가평역이야말로 경춘선 90분의 백미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어둠의 연속이다. 굴봉산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곧 기나긴 터널에 진입하고 차창 밖은 이내 어둠에 잠긴다. 그렇게 달리다가 다음 역을 알리는 방송이 나올 즘이면 덜커덩하는 소리와 함께 터널은 갑작스레 끝이 나고, 지하철의 옆 창에 머물던 어둠은 어느새 햇빛에 반짝이는 청평호와 자라섬으로 바뀌어 있다. 긴 암흑을 지나 보게 되는 이 빛의 세계가 경춘선 열차의 승객들만이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은 계절마다 각기 다른 모습을 지닌다. 봄이면 달콤할법할 색깔의 꽃들이 호수 너머 산등성이에 피어나고 있고, 여름에는 청춘들이 푸른 호수를 하얗게 가르고는 한다. 가을이면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나무들을 볼 수 있고, 겨울에는 고요해진 눈의 고장을 구경할 수 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그렸던 [설국]은 가평역의 풍광이었는지도 모른다. 가평역에 다다르면 책에서 잠시 눈을 떼고 바깥을 바라본다. 호수가 멀어질 즈음이 되어야 다시 눈길을 돌린다.
대성리 역에서는 지난밤의 즐거움을 씻어내지 못한 대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탄다. 단결력을 위해서인지 옷을 자주 맞추어 입는데, 그들의 점퍼에는 한국어로 된 대학 이름이 굳이 영어로 표기되어 있다. 영어를 하지 못하면 대학 이름을 알 수 없다. 일제강점기의 일어가 비슷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허튼 생각을 잠깐씩 해본다. 대성리 역쯤이면 지하철에는 빈 좌석이 많지 않기에 바닥에 앉아 조는 학생들도 꽤 있다. 바닥에 앉아 통행을 불편하게 하는 학생들이나 아직까지 술 냄새를 풍기는 학생들이 민폐라고 느끼고는 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쪼그려앉아 졸고 있는 학생들이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다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스물셋 언저리의 일이었는데 그제서야 내가 스물, 스물하나와는 조금 멀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평내호평역에서는 문명이 다시 돌아온다. 와이파이가 다시 잡히기 시작한다. 읽고 있던 책이 지루했다면 이때부터는 책을 접고 다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바깥에는 산과 강이 아닌 고층 상가들이 자리해있다. 이전 역들 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에 올라탄다. 나는 평내호평역에서부터 경춘선 열차가 그 특색을 잃는다고 생각한다. 역과 역 사이가 널찍이 5~6분은 떨어져 있던 이전 역들 과는 달리 이제는 2~3분마다 한 번씩 이름이 바뀐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도 서울의 외곽과 그리 다르지 않다. 정거장이 빠르게 몇 번 더 바뀌고 나면 종착지에 다다른다.
상봉역에서 여정은 끝난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다. 이제는 오늘의 목적지로 가야 한다. 경춘선만큼이나 배차간격이 긴 중앙선을 타러, 지하에 있는 7호선을 타러 사람들은 잰걸음으로 움직인다. 나 역시 걸음을 재촉하며 서둘러 움직인다. 나의 발걸음 뒤로 열차는 푸- 하는 소리를 내며 움직임을 멈춘다.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열차에는 여행의 여운이 남아있다. 열차에서 멀어질수록 경춘선 위의 기억들도 점점 더 희미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