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임 29화. 난도질당한 마음, 끝내고 싶어진 하루
기대하지 않으면 상처도 없을 줄 알았다
평범한 일상이 흘러갔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고, 그러면 마음도 덜 다친다고 믿었다.
임신이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세상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남편은 여전히 무던했고, 나는 여전히 허전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하루를 넘겼다.
애초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차라리 끝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괜히 나섰다가 또 설레발을 치면, 끝은 언제나 잔인했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그날, 묵언이 깨어졌다
그날도, 평소처럼 조용한 저녁이었다.
나는 거실에 앉아 멍하니 TV를 보았고, 남편은 서재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말이 없던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임신돼서 너무 기쁘다. 너무 행복하다.
우리 앞으로 좋은 일만 있고, 더 사랑하며 살자.”
너무 뜻밖이라, 한순간 멍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문 채 가슴이 조용히 울컥했다.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내겐 모든 것이었다.
그 말 한마디가 오래도록 그리웠다.
순간, ‘행복’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좋은 집도, 특별한 성공도 필요 없었다.
그저 나를 바라보며 함께하자 말해주는 사람.
그게 내 전부였는데.
콧잔등이 시큰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나도 잘할게. 우리 아기 잘 키우자…’
그렇게 조용히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보지 말았어야 했다
문이 열려 있었고, 서재에서 들려오는 자판 소리가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 그 소리가 웅성거리는 말처럼 들렸을까.
아니, 말소리도 아닌데… 왜 자꾸 신경이 쓰일까.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발걸음은 낯설 만큼 가벼웠고, 남편은 내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열린 문 사이로 스쳐 본 그 화면,
커다란 글씨 하나가 내 눈에 박혔다.
박혔고, 찢겼고, 무너졌다.
방금 전까지 나를 감싸던 따뜻함이 산산이 부서졌다.
물거품처럼 사라져,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았다.
그 문장 하나가, 그 문장 하나로 인해
나는 다시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난도질당한 마음, 끝내고 싶어진 하루
너무 아파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아픈 건지, 머리가 저린 건지,
그 감각조차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왜 이런 걸까. 왜 하필 지금.
왜 또 나인가.
이건 단순한 상처가 아니었다.
이건, 나를 기만한 배신이었다.
잠깐의 진심으로 무너뜨린, 가식과 이중성의 잔해였다.
후우…
숨이 턱 막혀왔다.
이젠 정말, 다 끝내고 싶었다.
모두, 전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