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임 이야기 41화. 잿빛 속으로, 또 한 걸음
장마에 접어든 요즘, 하늘은 잿빛으로 가득하다.
어릴 적엔 비가 참 좋았다.
일부러 우산을 접고 빗속을 걷곤 했다.
물웅덩이에 발을 담그며 첨벙첨벙 뛰던 그 시절,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드는 순간은 마치 세상을 내 품에 안은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
갱년기의 정서는 예고도 없이, 툭 건드리기만 해도 쏟아져 내린다.
빗줄기를 대비해 걸어가는 사람들의 우산이 부럽다.
저들에겐 ‘대비’라는 게 있구나. 그 대비가 주는 평안은 얼마나 따뜻할까.
끝없는 긴장 속의 하루
나는 아무리 준비해도 예고 없이 벌어지는 사건들 앞에 무너진다.
아이의 돌발 행동은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교통사고처럼 날 덮친다.
그 울컥함은 목구멍을 타고 오르고, 결국 아무도 없는 부엌에서 혼자 쓴 소주 한 잔을 삼킨다.
쓰디쓴 맛이 속을 데우며, 또 하루가 겨우 넘어간다.
층간소음, 또 다른 전쟁
오늘도 아랫집 여자로부터 문자가 왔다.
“층간소음으로 자다가 너무 놀라 깼고, 딸도 재택근무를 포기하고 출근했습니다. 너무 괴롭습니다. 다음 계약엔 이사 가겠다는 확답을 주세요.”
내가 출근 전까지 집이 조용했다.
그래서 이렇게 답장했다.
“8시 출근까지는 특별한 소음이 없었는데, 혹시 몇 시쯤 들렸을까요?”
책임을 회피한 게 아니다. 정말로,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기에 물은 것이었다.
하지만 전화가 걸려왔다.
“9시에, 새벽 1시에도 시끄러웠어요.”
나는 다시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럼 새벽 1시에 들린 건 언제쯤이었을까요?”
그 순간, 그녀는 돌변했다.
“이럴 땐 사과부터 하는 게 정상 아니에요? 말로 끝내니 뻔뻔하게 나오네요. 녹음 다 해놨고,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끝없는 사과, 끝없는 죄책
나는 그동안 수없이 사과해 왔다.
아이를 위해, 이웃을 위해, 내 삶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아이의 방 출입을 아예 금지시켜 거실에서만 생활하게 했다.
매트리스를 깔아 그 작은 공간에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학교에서는 어떤 아이가 칼을 휘둘렀고, 가정불화까지 겹쳐 아이는 한동안 크게 흔들렸다.
그래서 심리치료와 정신과 진료, 꾸준한 약 복용까지 이어졌다.
뻔뻔한 엄마가 된 나
우리 윗집에는 미취학 아동 세 명이 있다.
밤늦도록 아이들이 뛰어다녀도, 지인의 아이까지 놀러 와 시끄러워도 나는 '그럴 수도 있지'하며 넘겼다.
그에 비해 나는, 아이를 다그쳐 조용히 시켰고, 요구마다 맞추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에게 '뻔뻔한 엄마'가 되어 있었다.
몰아치는 세상
오늘은 남편이 생각 없이 내다 버린 재활용품이 방치돼 있었다.
아파트 단톡방에서는 나만 죄인 취급을 받았다.
내가 버린 게 아니었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다.
사람들은 상황보다 손쉬운 결론을 원한다.
그리고 그 결론은 언제나 나였다.
차갑게 식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며,
나는 또 한 번 잿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