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가 일상 - 김소연
차 한잔에 이렇게 재미있는 역사 문화 예술 영화 스토리가?
김소연 작가님의 『茶가 일상』은 단순한 음료를 넘어 차의 세계에 관해 인문학적으로 안내한다. 영화 속 장면부터 세계사의 흐름까지 차 한 잔에 깃든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6대 다류의 깊이 있는 구분부터 중국에서 육로인 실크로드를 거쳐 전파된 차(Cha)와 해로를 통해 전파된 티(Tea)로 나뉘며 이동 경로가 곧 이름이 된 '차(Cha)'와 '티(Tea)' 어원의 역사에 얽힌 흥미로운 비밀까지 차를 향한 저자의 탐구가 책 속에 녹아 있다. 이 책은 바쁜 일상에 지적인 즐거움과 따뜻한 휴식을 동시에 선사하며 차 한 잔의 여유가 어떻게 우리 삶의 태도를 풍요롭게 바꾸는지 보여주는 다정한 안내서였다.
중국 황제가 보내준 재스민꽃차… 알고보니 백차?
p.75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 꽤 비중 있게 출연하는 ‘꽃을 피우는 차’는 찻잎 위에 말린 꽃을 올리고 전체를 실로 가볍게 묶은 후 증기로 찐 다음 말려서 만든다. 동그랗게 말려있다. 물을 부으면 화려한 꽃이 피어난다고 해서 ‘공예차’라고도 한다. 꽃을 감싸는 찻잎은 주로 백차나 녹차를 쓴다.
녹차는 알겠는데 백차는 잘 모르겠다는 분이 많을 터. 백차는 6대 다류 중 가장 가공을 하지 않는 차다. 열을 가해 덖거나 비비기를 하지 않고 시들기만 한 후 그대로 건조시켜 만든다.
p.77
백차에는 폴레페놀의 일종인 카데킨이 6개 다류 중 가장 많이 들어있다. 폴리페놀에는 항상화 성분이 많다. 당연히 백차는 6대 다류 중 항산화력이 가장 강하다 ‘커피 대신 차를 마시면 노화가 늦게 온다’라는 말도 있는데 거기에 가장 적합한 차가 바로 백차인 셈이다.
p.78
중국의 대표적인 꽃차는 재스민차다. 중국 식당에 가면 늘 가장 먼저 내어주는 바로 그 차다. 2020년 기준 중국 전체 차 생산력의 3.8%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p.79
마리 앙투아네트만큼 옥죄어 외로웠을 공예차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자 마리아테레지아는 급기야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아들 요제프를 마리에게 보냈다. 천진난만하게 오빠를 반가워하는 동생에게 오빠가 하는 말도 역시 다를 바 없다. “네가 아이를 낳아야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관계가 견고해지고…”
p.80
공처럼 동그란 공예차는 어떻게 만들까?
우선 찻잎 여러 장을 모아 밑동을 꽉 잡는다. 찻잎이 펼쳐진 위에 말린 꽃을 올리고 전체를 실로 가볍게 묶는다. 이후 증기로 쪄서 말리면 실을 풀어내도 동그란 형태가 유지된다. 이 동그란 차를 뜨거운 몰에 퐁당 빠트리면 차가 물에 젖어 풀어지면서 찻잎 속에 숨겨져 있던 꽃이 피어나는 원리다.
왜 마리는 오빠한테 굳이 공예차를 내놓았을까. 오랫동안 나를 붙잡았던 질문이다. 각본가와 감독이 굳이 의미도 없는 그 장면을 단지 시간 때우고 눈을 즐겁게 하려고 집어넣었을까. 어쩌면 마리는 공예차를 보면서 외양은 한없이 아름답지만 실상은 옥죄이고 쪼임을 당해 그저 처연한 자신의 처지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찻잔 속에 갇힌 왕비의 초상
나는 항상 커피를 대신해서 차를 좀 즐겨 마셔야겠다는 생각만 있지 아직 차의 진정한 매력에 제대로 빠져본 적이 없다. 그런데 책을 보다가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 속 '공예차'를 매개로 백차의 인문학적 가치를 조명하는 내용을 만났다. 공예차는 항산화 성분이 풍부하고 가공을 최소화한 백차를 주로 사용하는데 실로 찻잎을 묶어 꽃을 감싼 뒤 뜨거운 물에서 피어나게 만든 정교한 차였다.
영화와 공예차를 엮은 저자의 해석은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의 아름다움보다 그 꽃을 만들기 위해 실로 꽉 묶고 증기로 쪄내야 했던 옥죄임의 과정에 주목했다. 후계 생산이라는 국가적 압박에 시달리며 겉모습만 화려하게 꾸며야 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지와 겹쳐졌다. 화려함을 좋아했던 허영심 가득한 왕비의 단순한 기호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쩌면 공예차는 그녀에게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자유를 저당 잡힌 채 처연하게 피어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상징물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4황자님은 태평후과, 8황자님은 일주설아…” 이게 다 녹차?
p.85
우리나라에서는 녹차 하면 ‘오설록 현미녹차 티백’을 주로 떠올리고 녹차 좀 아신다는 분들은 ‘우전’ ‘세작’ ‘중작’을 말하겠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p.86
또 한국에서 녹차는 종이컵에 티백 하나 넣어 마시는 차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중국에서는 보톤 녹차를 긴 유리잔에 우려 마신다. 찻잎이 물에 가라앉았다가 떠오르면 자리를 잡는 모양새 자체가 아름다워 이를 즐기기 위해서다. ‘차를 마시고 즐기는 것’은 예로부터 중국 문인들의 호화로운 풍류 생활로 여겨졌다. 녹차를 즐기는 법에서도 그런 풍류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p.90
차를 마시는 것은 말 그대로 차를 마시는 것이기도 하지만, 풍류를 즐기고 취향을 드러내는 일종의 의례이기도 하다.
눈으로 마시는 녹차의 쉼표
<보보경심 려>. 이준기와 아이유가 주연했던 드라마로 방영 당시 푹 빠져서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다. 책에 나온 원작처럼 차에 대해 자세히 나오지는 않았지만, 고려 황궁 안의 차 문화를 담당하는 다미원에서 주인공 해수가 상궁이 되어 황자들에게 차를 대접하는 장면들이 등장했다. 차를 우려내는 예법, 즉 다도나 해수가 차를 통해 황자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위로하는 치유의 과정을 통해 등장했던 차.
우리가 흔히 티백 정도로 알던 녹차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깊고 입체적이었다. 저자는 중국 문인들이 긴 유리잔에 차를 우려내어 찻잎이 물속에서 수직으로 오르내리는 모습을 감상했던 문화를 소개하며 녹차가 지닌 시각적 즐거움도 소개해 주었다. 여기서 차를 마시는 행위는 단순히 목을 축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안목과 취향을 드러내는 정교한 의례이자 찻잎의 움직임 속에서 마음의 여유를 찾는 풍류였다.
결국 녹차를 즐긴다는 것은 유리잔 속에서 펼쳐지는 작은 우주를 응시하며 바쁜 일상 속에 우아한 쉼표를 찍는 것이다. 드라마 <보보경심> 속 황자들이 각기 다른 녹차를 즐기며 자신의 성품을 드러냈듯 우리에게도 차는 단순한 갈증 해소를 넘어 나만의 취향과 풍류를 담아내는 근사한 의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커피에만 의지하는 하루를 틀어 녹차 한잔과 함께 쉼표를 찍을 수 있는 휴식 시간을 가져보고 싶다.
사무라이들이 전쟁 나갈 때 마셨던 ‘말차’
p.209
영화 <비긴어게인>에서 일생일대의 녹음을 앞둔 데이브는 말차를 한잔 마신다. 그것도 제대로 된 다완에. <비긴어게인> 각본까지 직접 쓴 존 카니 감독이 ‘말차 좀 아시는 분 같다.’ 말차 모르는 사람도 있냐고? ‘말차’ 단어를 안다고 아는 게 아니다.
p.210
말차는 보통 채엽 20일 전쯤에 녹차밭에 지붕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빛을 가려주는 이유가 있다. 그래야 엽록소가 증가해 더 진한 녹색을 띠기 때문이다. 또 고소한 감칠맛이 배가 된다. 말차와 녹차는 제다 과정도 다르다.
p.211
말차가루로 말차를 어떻게 만들까. 말차를 만들 때는 국그릇 크기 정도 다완을 사용한다. 다완에 말차가루를 넣은 후 뜨거운 물을 붓고 차선으로 저어 거품을 만들어낸다. 거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격불’이라 한다. 말로 하면 쉬워 보이지만 절대 쉽지 않다.
p.215
중국과 한국에서 차는 주로 선비의 문화였다. 신선처럼 차 한잔 마시며 시를 읊고 하는 게 그들의 풍류였다. 그런데 왜 유독 일본에서는 사무라이의 문화가 됐을까. 우선 일본 지배층이 사무라이였던 게 크다. 전쟁터에서 매일 전투를 해야 했던 사무라이들은 다도가 그들의 부족한 교양과 문화적 소양을 채워줄 수 있음을 간파했다. 그뿐인다. 내일 차를 전투에서 과연 내 머리가 내 목에 붙어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극도의 불안감을 다스리는 데도 차는 효용이 컸다.
긴장감이 극도로 휘몰아치는 와중에, 경건하게 말차 한잔을 마시는 시간은 그들에게 곧 구원의 시간이며 도의 시간이었을 터.
전장의 무기에서 일상의 구원으로
말차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말차라떼나 달콤한 케이크 정도였다. 언젠가 남편이 녹차와 말차의 차이를 설명해 준 적이 있는데, 그때는 별 관심이 없어 한 귀로 흘렸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책을 통해 다시 만난 말차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정교했다.
녹차와 말차가 뭐 그리 다르겠냐 싶지만, 알고 보니 말차는 수확 전 빛을 차단해 감칠맛을 극한으로 끌어올리고 '격불'이라는 정교한 손길을 거쳐 완성되는 정성의 산물이었다. 특히 매일 생사의 기로에 섰던 일본 사무라이들에게 말차는 단순한 음료 이상의 의미였다. 전장의 불안을 다스리고 정신을 집중하는 구원의 시간이었던 셈이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평온을 찾는 고귀한 의식이었을 그들에게 어쩌면 다완(茶碗)은 전장의 칼만큼이나 예리한 정신을 유지하게 해 준 또 하나의 무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녹차의 쓴맛을 즐기지 않았던 건, 어쩌면 제대로 된 차를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티백이나 달디단 말차라떼 대신, 정성을 다해 격불한 제대로 된 말차 한 잔을 마주해보고 싶다. 책을 읽다 보니 사무라이들이 찾았던 그 고요한 평온이 찻잔 속 어디쯤 숨어있을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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