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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식공장장 Apr 16. 2018

인재를 내다 버리는 방법

조선 리더십 경영

1. 최근에 정부가 NCS채용, 블라인드 채용 등으로 인재를 확보하는 방법을 다변화하고 있다. 꼭 필요한 분야의 인재를 채용하기 위해, 편견을 버린 채용을 하기 위해서 도입된 제도이다. 물론 이것이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선 여러 가지 논의가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대한민국에는 이런 제도의 도입이 검토퇼 필요가 있다. 


워낙 인재 채용에 편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이력서를 써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한국 이력서는 유난히 특이한 걸 많이 물어본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모 그룹사는 입사할 때 부모의 학벌, 집의 거주환경(자가/전세/월세), 부모님의 요직 근무 (고위 공무원, 대기업 임원 등)을 모두 적어야 이력서를 쓸 수 있었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런 스펙이 업무에 도움이 안 될 거라는 건 다 알 것이다. 편견에 따라 사람을 덜어내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그리고 더 악용하면 요즘 시끄러운 부정채용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자칫하면 꼭 필요한 인재를 내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출처 : 성호기념관]

2. 성호 이익 (星湖, 李瀷 : 1681~1763)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 실학자이다. 그는 한 번도 조정에서 중요한 일을 맡아본 적이 없는데 이는 그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바로 형 때문이었다.


형인 이잠은 경종이 세자일 때 노론 대신들이 경종에게 이롭지 않다는 상소를 올렸다. 실제로 노론은 동생인 연잉군 (훗날 영조)를 미는 세력이었고, 가뜩이나 심한 경종의 무기력에 불을 지피는 사람들이었으니 지극히 옳은 말이었지만 옳은 일을 한다고 잘되는 법은 없는 법, 결국 이잠은 옥사했고, 덕분에 동생인 이익도 벼슬길이 막히고 만다.


그는 이런 폐단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문벌 가문의 자식들이 쉽게 급제할 수 있는 기존 과거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여론과 평판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공거제를 주장하였다. 이후 세도정치가 본격화되면서 소위 '빽'이 좋으면 급제할 수 있을 정도로 과거 시스템이 타락했음을 보면 이것도 놀라운 통찰력이라 하 수 있을 것이다.



3. 하지만 그의 통찰력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우리는 역사 시험칠 때, 이익의 성호사설 정도만 외우고 넘어가서 잘 모르지만 그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유명하다. 무려 그 시대에 일본의 미래를 정확히 예언해냈다.


왜황이 실권한 지가 불과 6, 700년밖에 되지 않는데, 국인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어서 그 사이에 차츰 충의로운 사(선비)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명분이 바르고 주장이 이치에 순하니 훗날 반드시 한 번 그 뜻을 펼칠 날이 올 것이다. 만약 에조가시마(훗카이도)인들과 연결하고 왜황을 보좌해서 제후들에게 호령한다면 필시 대의를 펴지 못하진 않으리니 66개 주의 태수들 가운데 어찌 뜻을 같이 해서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 만약 그러한 지경에 이른다면 저쪽은 황제이고 우리는 왕이니 장차 어떻게 대처하려는가?


<성호사설' 17권'일본 충의(日本忠義)' 편>


이 글은 여러모로 놀랍다. 당시 중국의 역대 왕조는 자기를 제외한 모든 나라를 제후국, 즉 조공을 바쳐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일본의 최고 지위자는 덴노(天皇)이며, 최고 실권자는 쇼군(將軍)이라는 사실이다. 최대한 간단히 말하자면 덴노는 명목상 최고 지도자로 수도를 통치했으며, 쇼군은 실권을 가진 통치자로 일본 전역을 통치하는 사람이었다. 명목상 덴노는 옥황상제이므로 인간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쇼군이 덴노의 권력을 다 빼앗아버린 것이지만.


그래서 당시 일본의 외교 관계는 굉장히 복잡했다. 우선 조공이 그렇다. 덴노는 신의 현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중국의 조공 요구를 받아들이면 신이 인간에게 조공을 하는 꼴이 되고 만다. 


이를 피하기 위해 실권자인 바쿠후(幕府)는 자신들이 실권자임을 강조했다. 즉 자신들이 조공을 바치는 세력으로 나선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대외관계에서 덴노보다는 바쿠후가 부각되고 만다. 이후 일본의 외교는 덴노가 아니라 바쿠후가 중심이 되었으며 특히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은 아예 명나라에게 책봉까지 받았다. 즉 덴노라는 존재를 무시한 외교를 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어느 정도 덴노에 대해 감을 잡고 있었다. 세조대 신숙주가 해동제국기를 통해 덴노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익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이익여담이지만 데지마를 통해 교역하는 네덜란드 상인들도 쇼군만 만났지 덴노는 알지도 못했다. [출처 : 큐슈나비넷 https://kyushu-navi.net]

성호 이익은 위의 글과 같이 일본의 쇼군 체제가 민심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점, 충의로운 선비들이 이를 복권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앞으로 일본이 황제국을 칭할 것임을 정확히 예언했다.


이는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서운 예언이었다. 이후 일본에서는 유신 지사들이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주기 위해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실행한다. 결국 유신 지사들이 승리하고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자신의 권력을 메이지 덴노에게 돌려준다.


그러자 이후 일본은 조선과의 외교 관계에서 '조선은 왕이 최고고 우리는 황제가 최고니 우리에게 조공하라=우리가 의전서열이 높다'는 해괴한 논리를 밀어붙인다. 조선의 조정은 갑자기 변환 상황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모순을 간파하고, 그 모순이 어떻게
조선을 위협하는지까지 간파하고 있었다


참고로 성호 이익은 메이지 유신 100여 년 전에 태어난 사람이다. 그전까지 일본의 시스템을 예측하고 분석한 사람은 있었지만 이렇게 무서운 통찰력으로 미래까지 꿰뚫어본 사람은 없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성호사설의 일본충의에는 대정 봉환뿐만이 아니라 무진전쟁 그리고 신 정부군이 메이지유신을 일으키는 것까지 모두 적혀있다. 



4. 메이지유신은 이후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중요한 사건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일본이 덴노를 중심으로 한 용어를 중심으로 수교를 요청하는 것(천황, 황조 등의 용어)을 괘씸하게 여기고 수교를 중지해버린다. 이것이 서계거부사건이다.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를 근절시키고 왕의 권한을 높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외국과의 통상면에선 영 아니었다. 일본이 에도를 중심으로 근대화하면서 힘을 갖춰가는 것을 묵시하고 있었고, 결국 고종이 떠밀려서 개화를 할 때는 일본보다 훨씬 불리한 조건에 수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5. 만약 이익이 능력을 인정받아 정치노선에 들었으면 어땠을까? 영정조대의 인물이니만큼 우수한 주군 밑에서 뛰어난 통찰력을 바탕으로 개화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이 국력을 갖춰나갔으면 어쩌면 지금 이 나라의 이름이 조선으로 남아있을 수 있지도 않았을까?


하지만 이익은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형 때문에
그것도 바른 말하다가 파벌에 찍혀 죄를 받은 형 때문에


역사에 <만약>은 없다. 하지만 이익 같은 시야와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형이 죄인이라는 '연좌제'에 휘말려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그래서 이후 역사의 흐름이 더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역사 리더십 경영 매거진의 테마를 바탕으로 새로 엮어낸 <조선 리더십 경영> 이 와이즈베리/미래엔에서 2018년 11월 하순 출간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메일 : inswrit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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