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100주년 특집 (1)]
1. 2019년 2월 27일, 3.1 운동 100주년을 맞는 주에 맞춰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를 다룬 <항거 : 유관순 이야기>가 개봉됩니다. 주연은 고아성, 배급은 롯데엔터테인먼트가 맡습니다.
영화는 개봉 전이라 제가 아직 못 봐서 잘 모르겠고요, 다만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영화 이야기라기보다는 영화의 모델인 '유관순 열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전 지식이 있어야 이해가 잘 되지 않겠어요?
유관순 열사는 1902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리고 1919년 아우내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 1920년 9월 옥중에서 사망하지요. 그리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계십니다. 그리고 3등급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죠.
이 내용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생각 없이 주루룩 읽어보면 그냥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사실이지요. 하지만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하나하나 분석해보면 이것만큼 이상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조선 리더십 경영>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역사적 사실은 통찰력을 갖고 봤을 때 새롭게 보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죠.
이 두 줄을 비판하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으면 사실이 달리 보입니다.
2. 보통 역사만화라던가 드라마의 묘사를 보면 유관순 열사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간 모습, 재판장에서 당당하게 독립을 외친 장면이 나옵니다. 이건 다 아는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녀가 언니인 유예도 열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 그 만세현장에 부모님이 같이 참가했다는 것 그리고 그 부모님인 유정권 열사, 리소재 열사가 단순히 만세운동에 참가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3.1 운동에 참가한, 자녀들에게 나라의 얼을 교육시킨 교육자라는 것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관순 열사는 가족끼리 운동에 참가했다가 가족을 잃은 사람일 뿐이에요.
이 사실을 알고 의미를 파악할 때 비로소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이라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친일파도 묻힌 현충원에 이 정도 상징성이 있는 유관순 열사가 묻히지 않는 게 말이 되나요?
이 이유에 대해선 여러 가지 이유가 분분합니다. 보훈처가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한 독립운동가에 대해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고 (지금 보훈처 수장이 수장이니만큼 이 부분은 제대로 될 것이라 믿습니다)
국립묘지밖에 묻힌 독립유공자 <YTN>
다만 제가 걸고넘어지고 싶은 것은 현황입니다. 김구 선생, 유관순 열사 등의 묘가 국립묘지 밖에 있는 마당에 친일파, 만주군 출신의 묘가 현충원에 있는 것이 이슈가 되면 꼭 반대 의견이 튀어나옵니다. '그냥 만세 부르다 잡힌 사람을 다 현충원에 묻어주면 끝이 없다'. '이화 사학재단의 마케팅일 뿐이다'라는 반발이 꼭 나오지요.
이 말은 얼핏 보면 옳게 들립니다. 당시 3.1 운동에 참여한 사람이 무려 200만으로 당시 조선 인구의 1/5 수준이니 이 사람들을 다 현충원 국립묘지에 묻어줄 수야 없겠죠. 모범이 되는 분을 안장해야 맞겠죠. 기여를 한 분을 안장해야 맞겠죠.
그런데 유관순 열사가 그렇게 폄하되어야 할 분인가요?
3. 저는 3.1 운동 100주년을 기회삼아 유관순 열사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관순 열사는 단순히 나와서 만세 부르다 잡힌 것이 아닙니다. 우선 한성 감옥 등의 수감기록을 보죠. 그녀가 체포된 나이는 17세입니다. 일본 나이로는 16세, 미성년자죠. 일본은 한국과 같이 대륙법 체계를 다릅니다. 메이지 유신 당시 법 체제를 정비할 때도 대륙법을 따랐지요. 그런데 대륙법 어디를 뒤져봐도 18세 미만 미성년자가 재판받는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왜 일제는 굳이 미성년자인 유관순 열사를 재판에 회부한 것일까요?
그녀는 미성년자인데도 불구하고 재판에 회부됩니다. 이때 그녀는 '난 왜놈에게 굴복하지 않는다'면서 의자를 던졌다는 이유로 5년형을 선고받습니다만 이건 법정 형량을 크게 벗어난 것이었죠. 이후 항소에서 3년형으로 감형되었고 이후 영친왕과 니시모토미야 마사코 여사(이방자 여사)의 결혼 특사로 1년 6개월로 감형되지요. 하지만 일본은 그녀의 출소일 2일 전에 출소시키지 않고 옥에서 살해합니다.
뒤집어 생각해보죠. 3.1 운동에 참여한 사람이 200만 명입니다. 일본이 그 사람들을 죄다 수감한 건 아니거든요. 중요한 사람만 잡아서 넣은 겁니다. 그리고 고문을 집중적으로 가하거나 죽인 것도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에요 (이런 기록은 서대문 역사 형무소 역사관에서 보시면 좋습니다).
일본이 중요 인물도 아닌 유관순 열사에게 5년형을 언도하고
출소 직전에 죽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법에 대해 무지했던 것 아니냐고요? 아니요 이미 8년전인 1911년 안악사건에서 독립운동가 전원에게 말도 안되는 유죄를 때렸다가 외신의 눈을 의식해서 윤치호 양기탁 등 6인에게만 유죄를 준 적도 있습니다. 일제는 무리수를 둬서 유관순 열사를 체포한겁니다.
4. 그녀의 부모는 단순한 시민이 아니라 교육자였습니다. 민족의 얼을 잊지 말 것을 교육시키고, 이에 힘쓸 것을 교육시켰죠. 스스로 독립만세운동에 나설 정도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부모였고, 자녀들도 이를 본받아 스스로 독립운동을 기획할 정도의 행동력과 의지가 있었습니다.
열심히 친일하고 동포를 핍박하고서는 구국의 영웅으로 포장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지금, 친일 조상의 과거를 미화하고 독립운동가를 비하하는 사람들이 많은 지금, 일제의 힘에 굴하지 않고 의지를 갖고 행동한 그녀는 본받아 마땅한 위인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을 단순히 3.1 운동 참가자로 규정하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요.
보통 한국사람들은, 심지어 지금도 나이가 어리면 폄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린 게 뭘 아냐는 거지요. 유관순 열사를 대하는 태도도 여기서 기인한다고 봅니다. 어리니까 주도성 없이 그냥 끌려다녔다고 여기는 거죠.
하지만 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사람은 나이나 지위를 떠나 사상과 뜻 그리고 행동으로 대우받아야 합니다.
유관순 열사는 일본의 입장에서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나이에도 학생만세운동 기획에 참여하고 스스로 앞장서서 참여했으며 미성년자 재판에 앉혀놓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재판장에게 의자를 집어던질 정도로 의지가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매일같이 고문을 당하면서도 옥중에서 독립만세를 외쳤어요. 생각해보세요. 당시 일본군은 칼로 사람을 토막 내고 군대를 불러 사격까지 할 정도로 강경진압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그 상황에 3.1 만세운동을 하실 수 있으셨겠어요?
일제는 이렇게 의지가 강한 사람을 살려놓으면 나중에 더 큰 후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녀를 출소 2일 전에 살해합니다. 이전에는 고문 과정에서 죽였다는 말이 있었는데 여러 증언과 연구결과로 볼 때 살해했다는 것이 유력합니다.
당시 일제는 재판으로 죽일 수 없지만 식민통치에 방해가 되는 사람을 재판 없이 살해했습니다. 유관순 열사도 그중 한 명이었죠. 그녀가 출소일이 되어도 나오지 않자 그녀의 죽음을 직감한 이화학당의 교장이자 선교사인 룰루 프라이 (Lulu E. Frey)씨가 강력하게 요구하자 마지못해 시신을 넘겨줬다고 하죠(당시 기록은 제가 찾아본 결과 참흑했다, 토막이었다는 것만 찾을 수 있었습니다. 현충원의 문화 해설사님은 토막시체가 맞다고 설명하시더군요).
그녀는 3.1 운동의 주동자는 아닙니다. 참여자이자 행동가이지요.
하지만 그 행동과 삶 만으로도 상징이 될 자격이 충분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녀를 잊지 말아 주세요. 적어도 올해만이라도 좋으니 그녀의 뜻을 한 번 더 떠올려주세요.
5. 그리고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 이태원 망우리 공동묘지라고 적어놓음 잘 감이 안 오실텐데 이 묘지에 묻힌 42000기의 무덤은 대부분 무연고자의 무덤입니다. 즉 그녀의 국립묘지 안장을 위해 애써줄 사람이 없다는 거죠. 챙겨줄 가족, 후손이 없다는 것은 그녀의 선택이 결코 가볍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6. (추가) 2019년 2월 26일, 그녀가 순국한지 99년되는 해이자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 문재인 대통령께서 그녀에게 1등급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할 것을 발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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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조선 리더십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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