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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식공장장 Aug 21. 2019

종이 속에 갇힌 조정래 <천년의 질문>


1. 제가 <태백산맥>을 처음 읽은 시기는 1994년도였습니다. 이유는 동 시기에 개봉한 영화 덕분이었죠. 영화계의 거장 '임권택'감독이 그렇게 만들고 싶었던 프로젝트라는데 끌려서 흥미를 가졌지만 당시 영화를 볼 나이는 안되었으므로 책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죠. 

그때 저는 시대의 파도에 휩쓸리는 체험을 했습니다.


수백 명이 넘는 정교한 설정을 입은 캐릭터들이 그려내는 방대한 이야기에 빠진 저는 이후 나온 아리랑, 한강도 부랴부랴 읽었습니다. 조정래 선생님의 작품은 시대의 에너지가 뿜어내는 이야기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죠.


2.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정글만리(2013)'였습니다. 당시 저는 중국 비즈니스를 중국어로 토론하는 스터디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여기 참여한 사람들이 중국인, 한국인 할 것 없이 위화감을 느낀 것입니다. 이 중에는 한국계 대기업 전 중국지사장, 전직 대사도 있으니 그 위화감이 뭔지 금방 알아낼 수 있었어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가이드 북 수준의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중국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 당시 중국 진출이 활발하던 시장에서 기업들이 궁금해하는 내용에 대해 훌륭히 답합니다. 인터뷰를 보니 중국 주재원인 사위의 도움을 얻으셨다더군요. 


하지만 그 방법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꽌시(关系)란 집단적인 체제를 만들기 위한 토대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 좋아요를 눌러주신다던가, 덧글을 달아주시는 것도 충분한 꽌시죠. 하지만 소설은 이 꽌시를 학연, 지연, 혈연, 부정, 부패를 엮은 무언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꽌시의 형태이긴 하지만 꽌시는 아닙니다. 꽌시가 부정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죠. 우리도 겪잖아요? 상대에게 경의를 표하는 인사예절이,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고 상대방을 통제하는 문화로 변질된 것. 


여기서 정글만리의 위험함이 드러납니다. 


정글만리는 작가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져
재구성된 중국이라는 상자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가 된 것입니다. 전작들이 태산에서 시대를 외치는 웅장함이 느껴졌다면 정글만리는 노점에 좌판 깔고 물건 파는 이야기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이번의 신작 '천년의 질문'을 읽을 때는 많이 조심스러웠습니다.


3. 2019년에 나온 신작 <천년의 질문>은 한국사회의 어둠이었던 최순실 게이트를 다룹니다. 이 게이트를 다루기 위해 여러 가지 사회적 이슈를 다룹니다. 그런데 이 이슈를 다루는 방식이 많이 걸립니다. 

이전 조정래 선생님의 명작들이 작품에서 세계관을 만들고 그 격류에 독자를 던져 넣었다면 이 책은 그 격류를 어떻게든 느껴보라고 애걸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최소한만 언급해보자면 예전에는 상황 묘사와 짧은 대화로 상황을 파악시켰다면 이번 작품은 하고 싶은 말을 설명을 늘어놓음으로써 들어주기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대학교수인 사람은 국내에서 박사를 해봤자 해외 박사에게 밀려나는 현실, 250명 학교 출신 박사를 버리고 해외 박사를 얻는 현실, 이렇게 밀려난 사람이 걷는 현실을 모두 설명합니다. 이렇게 처음 등장인물 세 명의 사연을 이야기가 아닌 통계와 수치를 통해 읽으면 그 순간부터 지쳐버리게 됩니다.


이 책의 전개 방식은 굉장히 번잡합니다. 그리고 이런 형식이 계속 이어져요. 그 절정은 3권에서 나옵니다. 이태복 국민석유 부분은 사실 그 부분만 따서 놓고 보면 당시 신문기사와 비교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습니다. 


너무 계몽적이고 훈육적입니다.

4. 사실 이런 책이 처음은 아닙니다. 저는 태백산맥과 비슷한 시기에 이런 책을 읽은 적이 있어요. 일본의 유명 작가 다나카 요시키의 '창룡전'이었습니다. 이 작품의 소재는 일본 사회의 부패, 일본 정치의 부패인데요 이 부패를 미워하는 이유를 납득시키기 위해 대화에서 통계, 보도자료까지 그대로 이용합니다.


그런데 일상 대화를 보통 이렇게는 안 하잖아요?


결국 이 소설은 풍자를 계속 설명하려고만 하다가 후반에 그 설명이 한계에 달하자 연재 중지가 되어버렸습니다. 16년째 신간이 안 나오고 있거든요. 

설명하다가 연재 중단이 된 창룡전 <출처 : 아마존>

뭐 처음부터 아슬아슬하다고는 생각했어요. 그런데 설마 조정래 선생님의 작품이 그런 전철을 밟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소설은 스스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만들어낸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입니다.


그렇게 자꾸 신문기사, 통계자료를 인용한 보도자료 같은 느낌이 들어서 잘 안 읽히게 되네요.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종이속에 같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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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조선 리더십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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