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평화를 상징하는 와
평화의 뒷면에는 사회를 통제하는 시스템
오늘날 일본 사회를 길들인 1등 공신은 국가 시스템이다. 이 국가 시스템은 16세기부터 만들어졌으며 이 시스템이 사실상 거의 그대로 오늘날의 일본에 이식이 되었다. 그리고 사실상 거의 그대로 활용되고 있다. 물론 어느 사회든 시스템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 ‘와’는 차원이 다르다.
일본을 길들인, 일본만의 통제 시스템 ‘와(和)’는 수백년에 걸쳐 진화하면서 오늘날에 계승되었다. 이는 일본의 질서와 번영을 이루는 핵심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일본의 성장을 멈추고, 구성원을 통제하고 억누르는 족쇄가 되었다. 특히 오늘날같이 어제의 혁신이 오늘의 평범이 되고 내일의 유물이 되는 시대라면 이는 변혁에 큰 장애다.
그런데 이 ‘와’의 통제, 우리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일까?
일본어 중 제일 많이 듣고 쓰는 한자는 뭐가 있을까? 나는 ‘和’라고 생각한다. 일본 사람들은 ‘와’라고 읽는다. 뜻을 굳이 붙이자면 ‘일본 고유의 무엇’이 되지만 따져보면 그 이상의 사상적 함의가 있는 말이며 해석에 따라선 일본 그 자체이기도 하다.
‘와’의 기원은 대개 6~8세기 아스카(飛鳥) 시대의 정치가였던 쇼토쿠 태자(聖德太子)가 만든 헌법 17조라고 한다. 즉 와는 처음부터 일본을 상징하는 단어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일본이 국제 기록에 등장한 것은 중국 한서 지리지다. 1세기경 왜(倭)라는 국가가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왜는 국가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부족에 가까웠고 이 왜의 내부에서 전쟁을 통한 권력이 뭉쳐 국가의 형태를 갖춘 것은 3세기였다. 이 근대 국가의 이름이 야마타이였고, 이 야마타이가 일본사 최초의 국가인 ‘야마토(大和)’로 발전한다.
이렇게 일본은 뒤늦게 국제사회에 데뷔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일본의 문물을 ‘와’로 표현하게 되었다. 일본 음식은 와쇼쿠(和食, 음식), 문화와 사상은 와후(和風, 일본풍), 와노코코로(和の心, 일본 정신) 등으로 표현된다. ‘와’를 붙여서 단어를 만들면 일본의 무언가가 되는 수준이다.
그리고 이후에는 일본의 안정적인 시스템을 상징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 일본사회는 시스템을 운용하기 위해 사람을 평가한 후 그에 맞는 곳에 배치한다. 물론 이것이 일본만의 모습은 아니다. 단 일본은 권력자가 이를 강력한 시스템으로 만든 계기가 있다는 점이 특별하다. 그가 그 유명한 에도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였다.
히데요리를 꺾고 일본을 손에 넣은 이에야스. 그는 히데요시와는 달리 핏줄이 좋아서 ‘정이대장군’, 즉 쇼군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1인자가 된 그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자신과 같은 행운아를 막는 일이었다. 히데요시의 전철을 밟을 수는 없었으니까. 강자를 꺾고 1인자가 되기 위해 벌이는 아귀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이에 그는 히데요시의 ‘인소령’을 개선하는데 주력한다.
‘와’라는 통제시스템의 탄생이다.
이에야스는 무력보다는 행정력으로 평가받는 사람이다. 그는 에도(오늘날의 도쿄)를 터전으로 만들면서 이 뛰어난 능력을 충분히 보였다. 전국시대 일본에서는 덴노가 있는 교토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명분을 얻기에 좋았다. 그래서 일본최고의 지위에 올라선 히데요시는 이에야스가 교토 주변에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이에야스의 영지인 ‘슨푸’를 빼앗고 에도로 옮기도록 명한다.
이렇게 온 에도는 끔찍한 곳이었다. 우선 지형부터 사람이 살만 한 곳이 아니었다. 강줄기는 비만 오면 넘쳐났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지반은 침식되고 갯벌이 넘쳐났다. 소금이 배어서 농사짓기도 힘들었고 배들이 접근하기도 어려우니 무역도 힘들었다. 그 전에 성을 지을 곳조차 마땅치 않았다. 에도성은 수십년간 버려진 폐가, 아니 폐성이었다. 여기 까지만 해도 머리가 딱딱 아플 정도인데 생활 환경이 요런 모양이니 변변치 않은 산업 인프라가 없어서 무사, 영민들이 굶주리기 일수였고 배고파서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람들이 일으킨 민란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에 덤으로 옆에는 막강한 다이묘인 호조가문이 감시역으로 붙어있었다. 즉 히데요시의 주문은 한 마디로 말썽 많은 땅에서 시달리다가 망하라는 뜻이었다.
아마 이에야스가 보통 사람이었으면 새로 받은 영지에서 그나마 상태가 좋은 오다와라에 성을 짓거나, 아니면 에도성의 수리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달랐다. 가신들의 거주지부터 챙긴다.
얼핏 보면 이상적인 상사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이유를 알고 보면 아름다운 미담은 결코 아니다. 그는 자신을 보호하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에도성을 충성스러운 가신의 거주지로 둘러 쌓아 외적을 막는 방패를 만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설령 행운아를 꿈꾸는 누군가가 자신을 공격해도 가신들에게 막힌다. 게다가 불순분자를 멀리 두기에도 좋았다.
이런 모습은 기업 시스템을 위해, 불순분자를 걸러내는 식으로
일본기업이 그대로 계승한다.
나아가 일본 사회가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그 다음에는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것이다. 정권의 힘은 백성의 부에서 나오니까. 그러려면 우선 에도의 시궁창 같은 상황부터 해결해야 했다. 산을 깎고 바다를 메우는 강행군 끝에 에도는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도시가 되었다. 갯벌밖에 없는 도시가 바닷길을 활용한 항로를 통해 무역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최고의 땅이 된 것이다. 이 에도가 오늘날의 일본 수도 도쿄다. 이 에도에서 경제력과 병력을 비축한 이에야스는 결국 일본의 패자가 되었다. 이렇게 에도 막부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통일되었다. 하지만 권력은 통일되지 않았다. 다이묘들은 굳건했고 지방 토호들의 권력도 만만치 않았다. 권력의 균형이 조금이라도 무너진다면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전국시대가 다시 열릴지도 모른다. 이는 절대 과한 의심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에야스가 주력한 것은 다이묘들이 힘을 쓰지 못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에야스가 만든 캐치프레이즈가 바로 ‘와(和)’이다.
‘와’는 무력과 권력을 활용한 봉건국가식 독재 시스템이었다.
평화로운 시대를 유지하기 위한 정책인 ‘와’, 하지만 실제로는 절대 이름만큼 평온한 것이 아니었다. 전국시대에서 살아남은 이에야스는 평화보다는 힘을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명분상의 평화가 아닌 실질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지방 영주를 제어하려고 했다.
내일의 천하인이 되기 위해선 도전을 해야 하고 도전을 하기 위해선 군대가 필요하다. 군대는 곧 돈이다. 그러니 도전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돈줄을 죄는 것이었다. 직접적인 군대운용, 용병고용을 막아서 힘을 억누르기 위해 이에야스는 자금을 관리했다. 고쿠타카, 즉 자원을 재배분한 것이다.
이에야스는 정치적으로만 최고가 아니었다. 돈이 권력인 세상에서 전국 생산량의 25%를 장악한 실력자이기도 했다. 나가사키를 통해 무역을 독점했으며 주요 광산도 자신의 손에 넣었다. 그는 총 2800만석 중 400만석은 직할령으로, 300만석은 가신단에게 주어 총 700만석의 영토로 만들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나머지 2100만석의 처리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동군에 참전해서 이에야스를 도운 사람들은 당연히 서군의 다이묘들이 전원 처형될 것으로 생각했다. 히데요시 때 하급무사에게 땅을 주지 않아 불안요소가 생긴 역사가 있으니 이번에는 적을 싹 정리해서 그 땅을 나눠줄 걸로 본 것이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서군의 필두인 ‘이시다 미츠나리’, ‘안코쿠지 에케이’, ‘고니시 유키나가’ 단 세명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영토를 몰수하는 선에서 그쳤다. 그리고 나머지 모두에게 땅을 배분했다. 사람들이 이에야스에게 이유를 묻자, 이에야스는 평화의 시대 ‘와’를 중심으로 화합하기 위해 책임질 사람을 최소화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땅을 가질 사람들이 늘어나 버린 것이다.
히데요시 때는 다른 다이묘의 지지를 얻어 타이코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영지는 건드릴 수 없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달랐다. 자신의 편이 되어준 동군 다이묘의 고쿠타카도 100석으로 제한했다. 이는 자연스레 토호들의 세력약화로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예전의 전성기는 꿈도 꿀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된다.
일부 독재자들은 국민들의 삶을 일부러 힘들게 만든다.
서로 물고 뜯고 질투하고 증오하느라 권력을 비판할 힘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성곽 신축 금지, 선박 건조 제한을 걸었다. 즉 외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없고, 선박으로 이동하여 막부를 타격하는 것 자체도 차단되었다.
보통 다이묘들은 결혼을 해서 혼맥을 만들어서 서로를 지켰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영지를 재배치해서 친한 다이묘가 이웃하는 것을 막고, 다이묘 가문간의 결혼도 허가제로 만들었다. 말이 허가제지 눈 밖에 난 두 가문이 결혼하는 것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결혼 이상으로 불가능했다. 게다가 후계자도 막부가 정해줬으며, 후계자가 없을 때 양자를 들이는 것 또한 금지되었다.
그리고 백성들의 사회적 역할도 통제했다.
유교적 신분질서를 바탕으로 계층을 나누고, 해야 하는 일과 신분까지 중앙정부가 정해준 것이다.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점포의 배치다. 한국의 경우 하나의 업종이 잘나가면 그 주변에 같은 업종이 모여서 경쟁하고 이렇게 경쟁하면서 그 업종을 위해 모인 고객을 나눠가지는 경우가 많다. 핸드폰 전문매장, 카메라 전문 매장이 대표적인 예이다. 다만 이런 방식의 경우, 망하는 사람이 확실하게 나온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중앙정부가 정해줬다. 이러면 옆에 같은 품목을 파는 가게가 들어서는 일이 없다. 따라서 아예 안 팔리는 물건을 판다면 모를까, 나름대로의 수입을 올리게 된다. 이런 문화는 오늘날까지도 강력하게 작용하는데 실제로 요즘도 교토의 기온거리나 니넨자카 등의 인기 관광지의 기념품점들은 설령 같은 인형기념품을 팔아도 바로 옆의 가게와 같은 제품을 가게 앞에 진열하지는 않는다. 남은 것은 오는 손님을 잘 대하는 것이다. 물론 이 친절문화인 ‘오모테나시' 도 막부의 작품이다.
주요 도시, 화폐 발행 등은 물론 번의 수입과 지출마저 모두 중앙정부가 다 관리한다. 이는 단순한 경제시스템 운용을 넘어 다이묘들이 딴 맘을 먹지 못하게 하기 위한 시스템이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에도봉행’, ‘참근교대’를 들 수 있다.
‘에도봉행’은 큰 번의 제후를 ‘접대봉행’으로 임명해서 쇼군을 알현하게 하는 제도이며 ‘참근교대’제는 각 다이묘가 1년 단위로 자신의 번과 에도 근방에서 번갈아 거주하는 제도다. 이렇게 다이묘는 정치싸움에 강제로 끌려와서 스스로 소모되는 불운에 빠졌다.
내가 군대 있을 때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군대에서 교회에 갔을 때였다. 취학 전인 어린아이 같은데 못해도 중학생은 되어 보이는 아이를 마구 부리고 심지어 발로 차는 것이었다. 그런데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타이르자 고참이 막기까지 했다. 알고 보니 어린 아이의 아버지 계급은 소령이고 중학생 아이의 아버지는 중위였다. 아이들이 부모가 만든 사회권력 시스템과 권위에 아이들의 지위마저 묶여버린 것이다.
참근교대제도 마찬가지 효과를 낳았다. 각 다이묘는 에도의 저택에서 살게 된다. 물론 혼자 살면 안된다. 정실부인과 후계자가 들어오게 된다. 그들은 그 파워게임에 휘말리면서 무의식적으로 막부에 권력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경제적인 타격도 있었다. 다른 다이묘에게 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재산과 급에 맞는 규모의 일행을 구성해야 했다. 이 일행에는 가족만이 아니라 시종, 자신을 받드는 관료까지 포함되어 있다. 사람만 오는 것이 아니다. 파워게임에서 유리한 입지를 서기 위해 에도의 관료에게 선물도 준비해야 했다. 이 일행이 자신의 영지에서 에도까지 오가며 쓰는 돈은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부인이나 첩까지 데려왔으니 사치품으로 나가는 돈도 예상외로 컸다. 여성의 장신구는 곧 다이묘의 재력을 드러내는 거울이었으니까.
이렇게 에도 막부에게 버려진 사람들은 급격히 소모되어갔다. 앞서 말했듯이 이에야스는 자신이 믿는 사람은 자기와 가까운 곳에 배치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은 멀리 배치했다. 이렇게 멀리 떨어진 사람은 자연스럽게 에도까지 오는데 돈을 더 많이 써야했다. 아예 대놓고 핍박한 예전의 적 죠슈, 사츠마 정도쯤 되면 수백명이 수천 킬로를 오가면서 연수입에 1/3에 달하는 돈을 알현비로 날리게 되었다. 어쩌면 메이지 유신은 필연적인 사건이 아니었을까? 여담이지만 일본의 탄탄한 유통망, 지역경제기반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세율이 높은 나라가 바로 일본으로 무려 생산량의 50~70%가 세금으로 부가되었다. 물론 일본은 세율자체가 조선보다 높았으므로 이 비용자체는 부담이지만 비율자체엔 이견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도의 쇼군은 꼼꼼했다. 만약 지방에서 돈이 모이는 흐름이 잡히면 토목공사를 일으켜서 다이묘들에게 그 비용을 분담하게 했다. 미운 사람이 노력해서 기운이 날 것 같으면 더 괴롭혀서 기운을 더 빼는 식이다.
전국시대때 약소 세력이었던 오다 노부나가가 천하를 거의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해외문물이라는 변수 탓이었다. 칼이라는 전통에만 집착하던 다른 다이묘와 달리 그는 편견없이 포르투칼의 조총을 도입했고 이것이 일본에서 블랙배스급의 위력을 발휘했다. 이렇게 통제밖에서 실력이 크는 것을 막기 위해 이에야스는 해외무역을 독점했다. 모든 무역과 교류는 나가사키에 있는 데지마라는 인공섬에서만 이뤄졌다. 무역의 대상도 엄격하게 선발했다. 덴노가 있는 나라에서 예수라는 신을 믿는 크리스트교는 일본에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종교였다. 그래서 다른 나라는 모두 정리되고 포교에는 관심이 없는 네덜란드 상인하고만 교역을 했다. 당연히 교역을 통한 넓어진 통찰력과 이권은 막부의 것이었다.
농민은 전쟁에 나갈 수 없었고 무사는 농사나 상업에 종사할 수 없었다. 과거제 같은 것도 없어서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하고 능력이 뛰어나도 출세할 수 없었다. 일본사회가 사회 구성원을 자신들이 만든 시스템에 <배치>하는 성향은 이때부터 자리 잡혔다.
이렇게 에도 막부는 사회의 유동성, 통치변수를 억제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권력자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권력을 손에 넣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스템은 훌륭히 작동해서 에도 막부가 250여년이나 이어지는데 기여했다. 이것이 바로 이에야스라는 지도자가 꿈꾸는 나의 권력이 안정되는 ‘와’의 사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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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조선 리더십 경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