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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식공장장 Nov 28. 2017

콘텐츠를 지배하는 경영?

빙과, 고전부 시리즈

1. 2016년, 국내에선 애니메이션 빙과로 유명해진 소설 '고전부 시리즈'의 신작 '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가 발간되었습니다. 솔직히 5권의 국내 출판 연도야 2015년이라지만 원서 발매는 무려 2010년이었고, 일본에서 쓰다 절필하는 소설이 한두 권이 아니니 포기하고 있었는데 나와주니 다행일지도 모르죠.


고전부 시리즈를 둘러싼 속사정, 출판사인 카도카와의 배경을 모르는 입장이라면 말입니다.

드디어 에루와 호타로가! [사진출처 : 고전부시리즈]

2. 올 가을 일본 콘텐츠 업계를 몰아친 광풍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케모노 프렌즈'사건. 오모토 타츠키(尾本達紀)라는 3D 애니메이터 출신의 감독은 야오오로즈라는 제작업체에서 '케모노 프렌즈'라는 애니메이션을 만듭니다. 완전 저예산이지만 열의를 가지고 만든 탓인지, 감독이 케냐에서 살았던 경험과 동물사랑이 반영된 것인지 애니메이션은 엄청난 히트를 쳤죠.


문제는 초인기에 힘입어 퍼블리서인 '카도카와'가 타츠키 감독을 해고, 스탭, 전원을 전원 하차시키고 자신들이 미는 주력 스태프로 밀어 넣은 것이 감독의 트위터로 인해 퍼진 것입니다. 책으로 따지자면 인기 시리즈의 작가를 바꿔놓은 셈이죠.


당연히 일본 소비자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콘텐츠라는 것은 묘해서 '가'라는 콘텐츠를 만들어도 가를 잘 아는 C급 스탭과 가를 모르는 A급 스탭이 경쟁하면 전자가 승리하는 경우가 많죠. 그것도 압도적인 확률입니다. 에이스의 성공확률이 낮은 프로젝트, 카도카와가 기획자인 감독을 비롯한 모두를 강판시키자 카도카와의 주가가 급락하고 사장의 트위터엔 분노가 이어졌습니다. 


이후 카도카와는 소비자에 대한 비난, 일을 키운 타츠키 감독을 조롱하는 식으로 버티다가 결국, 재협상을 하겠다는 카드로 사태의 확산을 늦게나마 막았습니다. 이미 소는 외양간을 넘어서 태평양을 헤엄쳐 건너가는 판이긴 합니다만.


그런데 제겐 이런 풍경이 낯설지 않습니다.


3. 일상 추리물인 '고전부 시리즈'의 작가 요네자와 호노부는 2001년 카도카와의 라이트 노벨 공모전에 격려상으로 입상, 고전부 시리즈 1권인 빙과를 비롯 꾸준히 집필활동을 이어왔습니다. 이 고전부시리즈는 교토애니메이션이 카도카와 퍼블리싱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 '빙과(氷菓)'로 유명하죠. 작품의 완성도 덕에 시리즈의 판매량도 급격히 늘었다고 하네요.


문제는 여기서 작가와 카도카와의 불화가 엿보입니다. 공전의 히트작 애니메이션 빙과는 일상생활의 추리를 다룬 작품으로 주인공 오레키 호타로와 여주인공 치탄타 에루의 알콩달콩한 연애전선이 매력포인트였는데 원래 빙과는 이런 작품이 아닙니다. 엘릭시르가 출판한 한국어판도 있어서 많이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면에선 드라이하게 묘사되며, 현실의 벽과 장애를 분명히 묘사하고 있죠. 이 두 사람이 연인이 될 가능성도 있지만 헤어질 가능성도 있고, 작품의 전체 묘사도 그렇게 나가죠. 


왜 같은 작품인데 이렇게 성향이 달라진 걸까요?


이 고전부시리즈의 3권 제목은 '쿠드랴프카의 차례'라는 작품입니다만 원래 기획된 작품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실종된 에루의 삼촌 세키쿠치가 발견,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중심으로 심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작품이었죠. 


하지만 카도카와는 이 작품을 이렇게 마케팅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작품성은 어떨지 몰라도 이 작품은 라이트 노벨로 발매한 것이고, 이 라이트 노벨을 하드 하게 끌고 나가고 싶진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 카도카와는 3권의 출간을 거부합니다. 이후 어떤 의견이 오갔는지 알 수 없지만 원래 나올 3권은 도신샤라는 다른 출판사에서 '안녕 요정'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고 카도카와에선 정식 3권인 쿠드랴프카의 차례가 나옵니다. 


역시 엘릭시르가 출판했습니다.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세요. 고전부와 많이 유사합니다. [사진출처 : 안녕 요정]


즉 작가가 원한 원래 3권은 안녕 요정이고, 카도카와가 원한 3권은 쿠드랴프카의 차례인 것이죠.


4. 이후 고전부 시리즈이 양상이 바뀝니다. 3권 쿠드랴프카의 차례는 대놓고 라이트 노벨에서 많이 나오는 묘사가 이어지죠. 이후 작품도 고전부시리즈의 노선을 타긴 하지만 아기자기한 학교 생활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이후 연재 빈도가 떨어지더니 결국 5권과 6권은 6년 차이가 난 데다가 고전부 시리즈는 비정기로 연재되고 있죠. 


만약 이게 다나카 요시키처럼 쓰다가 마는 게 일상인 작가라면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요네자와 호노부는 꾸준한 집필활동으로 유명한 사람이고 저 6년간에도 여러 가지 실험작을 출간한 성실한 작가예요. 그런데 고전부는 왜 이렇게 늦어질까요?


여기서부턴 추측입니다만 전 작가가 작품에 대한 애정을 잃어버렸고 그 배경엔 카도카와가 있다고 봅니다. 애니메이션의 공전의 히트, 카도카와는 애니메이션의 공식을 따라가 주길 원했는데 이는 작가가 원한 방향과는 다르죠. 


이 작품이 원래 이렇게 연애노선이 강한 작품이 아닙니다. 인간의 내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씁슬한 작품이죠. [사진출처 : 빙과 애니메이션]


한 예로 에루는 호타로에게 밸런타인 초콜릿을 안 줍니다. 아주 친한 사람에겐 안 준다는 집안의 규칙 때문이라죠. 그런데 애니메이션 부끄러워하면서 말하지만 소설에서는 활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는 거죠. 아마 일본인과 몇 번 얽히면 이게 얼마나 큰 차이인지 알 겁니다. 굳이 일본인까지 갈 것도 없이 현실이라면 집안의 규칙이라면 접대용 미소를 띠겠죠. 이 작품처럼 인간의 일상적으로 뒤틀린 면을 소재로 쓴다면 더더욱 그렇죠.


카도카와는 알콩달콩한 라이트 노벨, 작가는 인간의 감정을 현실적으로 바라본 추리소설, 둘이 바라보는 고전부시리즈는 다른 모습이었고 결국 작품은 최악의 결과를 맞게 되었습니다.


5. 콘텐츠 산업이 거대해지고 들어가는 비용도 많아지는데 소비자층은 전체적으로 줄어드는 지금 경영진에겐 숙제가 생겼습니다. 바로 수익의 효율화인데요. 문제는 수익의 효율화를 위해 콘텐츠 제작을 모듈화 했다는 것이죠. 


과거에는 공모전 등을 통해 발굴한 작품을 밀어줬다면
현재에는 고객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만을 모아서 작품을 조립합니다.


후자의 경우 안정적인 판매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경영진들이 선호하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콘텐츠의 다양성이 희석되는 거죠. 주인공들이 다 비슷비슷합니다. 이게 영상매체로 만들어져서 성우가 들어가면 성우까지 저 '조합'에 들어가기 때문에 개성이 사라지죠. 이렇게 조합으로만 이뤄지는 콘텐츠 세상에서는 개성 있는 콘텐츠가 기회를 얻는 것 자체가 힘듭니다. 


앞에서 말한 케모노 프렌즈는 순전히 고객들이 열광한 작품이지, 카도카와가 밀어줘서 뜬 게 아니에요. 저예산으로 야근, 주말출근을 불사하며 만들었고 성우는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거나 스케줄이 한가한 사람들로 만들어서 제작비를 낮췄습니다. 이런 현황은 창작에 대한 열의를 꺾고, 새로운 인력의 수혈을 막게 됩니다.


어쩌면 이는 콘텐츠 업계, 특히 일본같이 버블로 무너진 경제를 이끄는 주축이 된 일본의 콘텐츠 업계에게 필요한 생존법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기업은


좋은 콘텐츠를 발굴, 마케팅하는 것이 역할이 되어야 하지
콘텐츠의 창작에까지 관여하는 손이 되면 안 된다


저는 경영진은 좋은 콘텐츠를 키우는 역할을 해야 하지, 작품 하나하나의 속사정까지 관여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그것은 크리에이터가 가진 고유 권한이거든요. 


물론 저는 지금의 고전부시리즈도 좋아해서 계속 활발히 내줬으면 좋겠습니다만 6권 출간에 6년, 그것도 작품 활동이 활발한 작가가 저 정도라면?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아서 괴롭네요. 


어찌 되었든 2017년이 되어서 겨우 6권이 정식 출간되었습니다. 그동안 평온하게 이어지던 에루의 인생에 온 반전, 이를 이해하는 호타로 사이에 새로운 감정이 싹트게 되네요. 과연 7권은 어떻게 마무리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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