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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런 맛에 걷는 거지

히맨의 머리 속은 아마도 먹을 것들로 가득한 것 같다.

by 히맨

"5월 3일 08시 31분입니다. 어제 운행 끝난 지 5시간 반 만에 또 운행을 시작합니다. 네 번째 보급지인 빅베어 시티로 향할 거고요, 약 28km 운행 계획 중입니다. 16시 안에는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30미터만 더 이동하면 저희는 PCT 400km 지점에 도달합니다."

"400인데 어때요? "

형이 브이를 들어 보인다.


"하하하~"

형의 귀여운(?) 척에 웃음이 터진 히맨.


"아직도. 열... 열... 열한번 더 가야 되는데?"

형 말대로 PCT의 10분의 1을 걸었다.


"오늘 이동한 것 까지 하면 이제 428km가 되는데요. 그럼 딱 10배입니다. 오늘까지 한 것만큼 9번만 반복하면 PCT 끝납니다. 얼마 남지 않았어요."

쿨한 척 별거 아닌 척 멘트를 날리는 히맨. 아마도 이렇게 말하며 '우리가 이렇게 대단한 도전을 하고 있다'는 자랑을 돌려 표현하는지도 모르겠다.


"야~10분의 1 왔다~!"

자랑스럽다기보다는 장난스러운, 아니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아 허탈한? 내려놓은 듯한 말투다.ㅎㅎ


"오늘 가면 마라톤 풀코스 10번 완주한 거리네요."

마라톤 풀코스 42.195km. 그러니 정말 풀코스를 열 번 달려야 하는 거리를 걸어왔다. 히맨은 마라톤을 시작한 이래로 풀코스를 일 년에 2번 넘게 뛰어본 적이 없다. PCT는 풀코스를 100번을 뛰어도 더 달려 나갈 거리가 남는 그런 긴 길이다. 도저히 감이 오지 않는다는 그의 표현은 결코 거짓이 아닌 것 같다.


"세 시간 자고 가는 건데 잘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질적으로 잔 시간은 정말 3시간 정도. 처음부터 이렇게 무리하게 갈 생각은 없었던 둘이다. 누군가 기다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형이 할 수 있다를 외치며 양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스스로에게 기운을 불어넣는다.

출발 전 PCT 애플리케이션의 400km 지점 화면을 인증하는 사진을 찍는 둘의 표정이 밝은 걸 보니 컨디션은 나쁘지 않아 보인다. 그렇게 PCT 열여덟 번째 날이 시작된다.


얼마 되지 않아 나타난 동물 우리 안 쪽으로 곰 한 마리가 보인다.

"어제도 곰이 달려 나가는 것을 봤는데 이제 곰을 조금 주의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타난 곰이 갇혀있는 애니멀 케이지 앞에 잠시 멈춰 영상을 찍는 히맨. 이제 곰들을 자주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을로 간다는, 그리고 둘을 마중 나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둘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모양이다. 많이 자봐야 세 시간 정도 잤을 텐데 저리 신나서 걷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누구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계속된 야간 운행에 이은 바로 앞의 목적지인 빅 베어로 향하는 길은, 많은 물통들과 함께 있는 트레일 엔젤인 파파스머프의 안내판을 지나 계속된다.


"팬케이크가 있대요~!"


5km쯤 운행했을 때 한 하이커로부터 팬케이크를 해주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공짜 아냐? 공짜로 줄 거 같은데?"

기대감에 한껏 들뜬 히맨이 말한다.


"여기 PCT 맞아?"

앞장서 트레일을 벗어나 팬케이크가 있다는 장소로 향하는 형이 히맨에게 묻는다.


"몰라~ 일단 먹는 거 있으면 가야죠. 일단 먹고 봐."

그렇게 둘은 빅 베어 시티로 빨리 가야 한다는 사실은 잠시 내려놓은 듯 팬케이크를 향해 걸어간다.


"굿모닝~!!"

트레일 엔젤로 보이는 남자와 음식이 가득할 것으로 보이는 차를 발견한 형이 격한 반가움을 담아 외친다. PCT 마크가 붙은 모자를 쓴 트레일 엔젤은 익살스러운 포즈로 둘을 맞이한다.


"난 '스폰테니어스'예요"


"난 레전드야"

두 한국인 하이커를 맞이 하며 악수를 청하는 트레일 엔젤, 레전드. 형과 악수를 나눈 레전드는 형의 스틱에 달린 메시지가 적힌 기를 펼쳐 보더니 크게 웃는다. 이어 히맨에게도 악수를 청한다.


"환영해"

레전드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양 팔을 펼쳐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커피와 팬케이크를 줄까 묻는다.

캠핑의자에 둘러싸인 공간 가운데는 간이 테이블과 아이스박스가 놓여있다. 맛있는 음식들이 쏟아져 나올 듯한 멋진 트레일 매직 장소다.


"혹시 우유 같은 건 없나요?"

빵에는 역시 시원한 우유가 생각나는지 우유를 찾아보지만 아쉽게도 그런 건 없단다.


레전드의 팬케이크와 커피가 준비되는 동안 주변을 둘러본다. 그가 끌고 다니는 픽업트럭 옆면은 나무판자로 울타리처럼 꾸며놓았고, 거기에는 이곳을 들른 하이커들의 방명록으로 보이는 싸인과 글들로 가득하다. 형이 먼저 자신의 방명록을 남긴다.


"그래 이런 맛에 걷는 거지"


형의 뒤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히맨이 재미있다는 듯 한마디 한다.

둘은 정신없이 팬 케이크와 커피를 먹는다. 팬케이크에 시럽을 뿌리고 커피와 함께 잠깐의 휴식을 시작한다. 레전드와 함께 있던 아주머니는 길에서 맛보기 힘들었던 과일을 내왔고, 빨간 옷의 아저씨는 옆에 함께 앉아 여러 이야기와 농담들로 둘을 즐겁게 한다. 전부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확실히 재미있는 아저씨인 것 같다. 써모미터(Thermometer) 윤은중 어르신이 여기에 왔다 갔다는 사실도 듣게 된다. 형은 궁금했던 것들을 하나 둘 아저씨에게 물어보기 시작한다. 애플리케이션 상에서 푸들 도그 부시(Poodle dog bush)를 조심하라는 경고를 본 것이 기억났는지 어떻게 생긴 것인지 물어본다. 아저씨의 설명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 한 것 같지만 피부에 닿으면 많이 가렵다는 것은 알아들은 것 같다.

아저씨는 형의 상처투성이 다리를 보더니 한 마디 한다.

"다리에 상처가 많네. 하지만 그 정도는 '부부'지"

"부부??"

처음 듣는 용어에 형이 되묻는다.


"작은 부상을 '부부(boo-boo)'라고 해"

자신의 손등에 난 작은 상처를 보여주며 장난스럽게 다시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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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중에도 히맨은 정말 잘 먹는다. 그렇게 많이 먹고도 주는 음식을 거절하는 법이 없다. 15분으로 잡았던 휴식은 점점 길어져 어느새 30분을 훌쩍 넘긴다. 하지만 의자에 딱 붙은 듯 앉아 선뜻 일어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아, 어서 가야지...'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빅 베어 시티에 도착하기로 한 시간에 맞추기 힘들어지기에 조금 더 참고 걷기로 한다.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히맨이 아쉬운 마음으로 인사한다. 둘은 멋진 트레일 매직을 선물한 그들과 함께 단체 사진을 남긴 뒤 길을 나선다.


"메리 크리스마스"

빨간 옷의 아저씨의 쌩뚱맞은 작별인사는 마지막까지 둘에게 웃음을 준다.

다시 길이다. 히맨은 마을에서 쉬는 상상을 하며 열심히 걷는다. 얼마나 걸었을까. 멀리 커다란 호수가 보인다. 아마도 빅 베어 레이크(Big Bear Lake)인 것 같다. 영상을 찍으며 중간 보고를 한다.


"저 곳에 가면 모든 것이 있습니다."

마치 다 알고 있는 것 마냥 말하는 히맨의 머리 속은 아마도 먹을 것들로 가득한 것 같다.

더욱 속도를 내며 정신없이 걷던 히맨이 한 표지판 앞에 멈춰 사진을 찍는다. 발이 풀을 밟는 그림으로 된 표지판은 식물을 밟지 말라는 뜻인 것 같다. 언제가 한 번 잘 못 밟은 나무에게 자신도 모르게 "미안해"라며 사과했던, 이전과는 다른 모습의 히맨이다. 그제서야 히맨은 형이 뒤에서 멀어진 것을 알아차린다.


'왜 안 오는 거지?'

속도를 줄여봐도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결국 그늘을 찾아 잠시 길 옆에 앉아 쉬며 기다리기로 한다. 히맨은 기다림이 길어질 것 같은 생각에 고프로를 꺼내 중간보고를 하려 셔터를 누른다. 평상시처럼 날짜와 시간으로 기록을 시작하려 던 찰나. 형이 멀리서 걸어오는 게 보인다.

형은 한껏 흥분된 목소리로 히맨에게 외친다.


호텔 가서 자자~!!


20150503#18-1_near RD0249(399.96)-Big Bear Junction(428.28)

by 히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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