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미래가 떠오르거나 대단한 발견을 기대하며 걷는 이 길
"5월 3일 14시 48분,
형이 헛소리를 합니다."
"진짜로~!"
"어디 호텔?"
"베스트 웨스턴!"
"어디?"
"베스트 웨스턴! 지금 기다리고 계시대!"
"오~ 죽이네!"
"빨리 가자!"
"어쨌든 내일 쉬잖아요. 오늘 하고 내일이네? 오호호~!"
"호텔에서 자는 거야 우리!"
"오우~!"
"저기 마을이 보이는데 핸드폰이 왠지 될 거 같은 거야."
"딱 켰다?! 근데 딱 되는 거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어요. 근데 형이 계속 안 나타나길래 난 어디 낭떠러지 굴러 떨어졌나 했어."
히맨은 이제야 마음을 놓는다.
또 한 번 마주하게 될 트레일 매직으로 향하는 길. 하늘에 구름이 뭉게뭉게 넓게 펼쳐져 있다. 호텔에서 쉰다는 이야기를 들은 히맨의 마음도 구름처럼 두둥실 떠 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그저 신기한 듯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히맨의 머릿속 하나 둘 날아간 걱정과 염려들 사이로 새로운 생각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모두들 막다른 길이라고 가지 말라고 말리지만... 가보면 알아.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분명 길이 있다는 걸 말이야'
'심장이 쿵쾅대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일에 미쳐서 매진하다 보면, 기적은 분명히 일어날 거야!'
'그걸 꼭 내가 증명해 보일게!!'
'이번 PCT는 내 신념을 확고히 하는 과정이 될 거야.'
더 이상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알 수 없던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길.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일, 새로운 미래가 떠오르거나 대단한 발견을 기대하며 걷는 이 길은 스스로를 바꿀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히맨, 그러니까 그는 바뀌는 게 아니라 더 굳고 강하게 다져지고 있는 것도 같다.
"좀 더 빨리 와서 먼저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건데 늦었네요."
16시 06분. 마중 나와 계신 David kim 선배님이 보인다. 서로 가까워지며 악수를 한다.
"다른 친구는?"
“네 오고 있습니다.”
"저 친구들이 너를 만났다고 하더라고."
도로 옆에 의자를 놓고 쉬고 있는 팬케이크 엔젤들을 다시 만난다.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오늘의 엔젤, 데이비드 김 선배님의 차에 오른다. 다시 오랜만에 두 다리가 땅에서 떨어진다.
"5월 3일 16시 30분 정도 됐나요? 43분입니다."
고프로를 집어 든 히맨의 발 밑에 카펫이 깔려있다.
"호텔입니다."
PCT에서 맞이하는 첫 실내 숙소. 꽤 비싸 보이는 호텔 방이다. 히맨이 고프로를 형에게 향하자 형은 기분이 좋은 듯 카메라를 응시하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다시 고프로를 자신에게 돌린 히맨이 만세 하듯 손을 흔들어 보이며 말한다.
“아! 호텔 조식 먹고 싶었는데!!!”
서둘러 씻고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한 둘은 차례로 샤워를 한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며 이제 좀 살 것 같다는 형의 뒤를 이어 히맨이 따뜻한 물을 내뿜는 샤워기 아래 선다.
'아~ 따뜻하다.'
새까만 물이 몸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욕조 바닥이 검어진다. 이 장면은 어디선가 본 듯하다. <와일드>의 한 장면이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고(?) 있을 여유가 없는 히맨은 서둘러 물기를 닦고 옷을 갈아입는다.
"뭐 먹고 싶니?"
"이 친구는 파스타 먹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형이 말한다.
뭔가 있어 보이는 레스토랑에 방금 샤워한 거지(?) 둘과 그 둘을 먹이려는 아저씨 한 명이 앉아있다. 형이 먼저 비싼 스테이크를 고르자 히맨도 잠시 고민하는 척하더니 같은 걸 고른다. 그런데 맛은 상상하던 그것(?)이 아닌 그런 표정이다. 파스타를 먹을 걸 하는 후회를 한다.
둘이 어떻게 걷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자고 먹는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선배님의 바이크와 인생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한국말로 이렇게 긴 시간 대화를 나누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정말 고맙습니다!"
김 선배님과 호텔 앞에서 헤어지며 기념사진을 남긴다. 히맨이 셀카봉을 들어 올리는 그때, 고프로가 바닥으로 다이빙한다. 급히 집어 들지만 고프로의 LCD 화면은 이미 박살이 났다. 셀카 봉에 고프로를 옮겨 달면서 귀찮음에 고정나사를 끼우지 않고 들어 올린 것이 이지경을 만들었다. 뒤늦게 후회하지만 스스로 자초한 것을 어쩌겠는가. 그나마 렌즈가 박살 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애써 괜찮다며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히맨은 다시 고프로를 들어 올린다.
호텔 안. 둘은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형은 침대 위에서 여기저기 연락에 열심이고 히맨은 방과 로비 옆 PC가 설치된 곳을 정신없이 오간다. 그동안 쌓인 영상과 사진, 그리고 GPS 기록을 백업하느라 분주한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화를 쓰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이 PC도 아이튠즈는 쓸 수가 없다. 이제는 체념한 것 같다.
'전화할 일도 없는데 뭐...'
어느새 저녁을 먹기로 약속한 시간이다.
걸으면서 먹으라며 김 선배님이 사주신 식량을 대충 분배하고서는 테이블 앞에 앉는다. 저녁 메뉴는 젯보일에 끓인, 오늘 받은 인스턴트 김치찌개. 근처 마트에서 사 온 간식거리와 병맥주도 잔뜩 올려져 있다. 히맨은 처음 마셔보는 산뜻한 과일향이 풍기는 샥탑(Shock top) 맥주의 맛에 감탄한다. 한 병 두 병 마시더니 벌써 세 병째...
"5월 4일 00시 22분입니다. 5월 3일의 일기를 쓰겠습니다."
밤 12시가 넘어 날짜가 넘어간 19일 차. 깜빡하고 남기지 못할 뻔한 18일 차의 영상 다이어리를 남긴다. 적당히 기분 좋아진 히맨의 취중 다이어리가 시작된다.
"어제오늘 58km 운행했습니다. 18일 만에 처음으로 실내 취침을 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영상일기를 남기지 못했어요. 야간 운행하고 너무 정신없는 상황이라 컨디션을 위해..."
"어제 야간 운행하면서 느낀 건...
여태까지 뒤에서 서포트만 하다가 앞에 처음 섰을 때, 그 책임감과 무게감이 작지 않다는 것. 그리고 쉬운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또한 제가 이겨내야 할 극복 해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뒤에 있을 때는 내 뒤에 누가 없어도 나는 나를 책임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서 그렇게 두렵거나 힘들거나 하지 않았는데, 제가 앞에 가면서 뒤에 있던 사람이 없어졌을 때의 그 두려움은 작은 게 아니더라고요.
또한 저처럼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라면…
경험하고 배워야 할... 그런 위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랬고요. 여기 너무 좋네요...
매일 이렇게 신세를 지는데... 아, 그 생각을 했어요!
PCT가 제 가슴을 뛰게 했고,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에 거기에 올인을 해서 지금 와 있는 거고요. 이렇게 미쳐서 하는 만큼 그리고 많은 분들이 응원해 주시는 만큼 거기에 보답하는 길은 다치지 않고 무사히 제가 목표한 바를 이루고...
그리고 다들 안 된다고 쓸데없는 짓 그만하라고 하는데 여기서 멈추면은... 그 사람들 말을 제가 인정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 생각을 바꾸는 게 그리고 좀 더 멋지게 발전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그분들께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극과 극이네요 호텔에서 자다가 하루아침에 거의 거지 같은 생활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기분 좋습니다. 일단 맥주 한 병이 남아서... 세 병 짼데 벌써...
잘 마시고 푹 자도록 하겠습니다. 안녕."
20150503#18-2_near RD0249(399.96)-Big Bear Junction(428.28)
by 히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