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이 없는 게 일정이지. 그죠?

히맨 이즈 인 제주_Day#8_20170502

by 히맨
눈을 떴다.


눈을 뜰 때마다 보이는 건 내 텐트의 회색 벽과 검은 모기망이다. 침낭 안에서 몸을 뒤틀며 꿈틀댄다. 늦장을 부리고 싶어 진다. 순간 제주에 여행 온 게 아니라 내 방 침대에서 늦장 부리는 느낌이다.


‘일상이 되어버렸구나?’


여행이 일상이 되는 그 순간. 어떠한 변화든 익숙해지는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저번처럼 역시나 이번에도 아침 일찍부터 산에 오른 사람들은 내 방 아니 내 집을 보고선 “어머 여기 사람 있는 거야?” 한다.

‘네~ 있습니다. 있다고요~’

앨리를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빨리 정리하고 산에서 내려왔다. 어디 카페 같은 데서 좀 여유 있게 기다리고 싶었는데 딱히 들어가고픈 곳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조금 더 앨리의 집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간다. 경기장 방향으로 뻥 뚫린 내리막을 걸어 내려간다. 순간 떠오르는 멜로디.


익숙하긴 하지만 여전히 낯설고
버텨지긴 하지만 힘든 건 여전해
Part2 -Nell


드디어 여행자 쨍쨍의 집에 도착했다. 이렇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만남으로 이곳까지... 그저 인사치레로 끝날 줄로 알았던 “한번 놀러 와요”는 현실이 되었다. 노랑 지붕과 빨강 문이 달린 집과 초록 앞마당은 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듯했다. 무언가 신기한 마법이 펼쳐질 것만 같은 쨍쨍랜드.

여태껏 어느 집에서도 본 적 없던 샛노란 천장, 그리고 천장과 통일되지 않은 색깔의 벽에는 여행사진과 기념품 그리고 아이 혹은 어른의 편지글들로 가득했다. 그녀의 침실은 한마디로 핑크핑크였고,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욕실의 창 아래에 놓인 새빨간 욕조는 쨍쨍이 추구하는 삶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도 받았다. 말짜하우스에서의 행사에서 사진으로 본 쨍쨍랜드의 모습은 사실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냥 정신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들어와 본 그곳은 나의 예상을 완전히 깨버렸다. 불규칙함 속에서도 묘하게 안정감을 주는 보이지 않는 통일성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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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에 앉아 요거트를 먹으며 가벼운 대화가 오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맥들이 서로 겹쳤다. 내가 아는 지인이 이곳에 왔다 가기도 했단다. 또 제주에 지내는 지인과 함께 요가를 하는 사이였다. 세상 참 좁다.

이곳에서 가장 부러웠던 공간은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매트를 깔고 언제든 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 뒹굴 거릴 수 있는 테라스였다. 테라스에 벌써 자리 잡은 두 사람을 보고선 나도 누워서 따뜻한 햇빛을 즐기고 싶었지만, 그보다 먼저 일단 씻고 싶었다. 샤워를 하러 욕실에 들어갔다. 옷을 벗으려 하다가 아차 싶었다. 나는 당연히 창을 가릴 블라인드 등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건 보이지 않아 잠시 옷을 움켜쥔 채 망설였다. 테라스에 누운 두 여자가 뒹굴뒹굴 굴러서 반대편으로 오게 되면 샤워하는 한 남자의 알몸을 볼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에이 설마 이쪽으로 오겠어? 보면 또 어때~’하는 마음으로 씻으면서도 서두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특히 바로 창밖으로 보이는 고양이 밥그릇에 고양이가 등장하자 나는 가능하면 몸을 등지려고 노력했다. ‘아~ 고양이 귀엽다고 이쪽으로 오면 안 되는데...’하면서...

다행히 사고(?)는 없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보니 두 사람은 여전히 테라스에 있었다. 쨍쨍은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고 앨리는 매트를 깔고 누워 한껏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나도 드디어 상쾌한 상태로 매트를 깔고 엎드렸다. ‘아~ 이 여유 좋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기록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노트북을 들고 거실의 의자에 앉았다. 왠지 글이 잘 써질 것 같은 느낌인데, 이 공간 속에서 작업하는 내 모습을 담고 싶어 한편에 스마트폰을 세워놓고 타이머를 설정했다. 오랜만에 또 연출 샷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쨍쨍은 앨리와 나를 테라스가 있는 방으로 소집했다. 방바닥에는 아이들의 솜씨로 보이는 글 모음집들이 펼쳐져 있었다. 책으로 엮을 예정이라는 교사 시절 제자들의 일기와 글들을 함께 펼쳐 읽었다. 서로 인상적인 혹은 재미있는 글들을 찾아 소리 내어 읽었다. 발표를 잘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보미가 더 좋아졌다는 솔직한(?) 고백에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이 외에도 정말 재미있는 일기들이 많았다.

또박또박 눌러쓴 글들은 내가 어렸을 때도 이랬을까 싶을 정도로 솔직 담백했고, 파격적이고 입체적이었다. 한계가 없을 것만 같은 자신만의 세계를 펼쳐 보이기에는 평면의 작은 노트가 부족해 보였다. 문득 <카산드라의 거울>에서 읽은, 뒤통수를 제대로 한 방 맞은 듯한 느낌을 주었던 대목이 떠오른다.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아기는 생후 아홉 달이 될 때까지 자신과 세계의 나머지 부분을 구별하지 못해요. 그러고는 <아기의 애도>가 와요. 모든 것이 뒤집히는 순간이죠. 지금까지 자신이었다고 믿었던, 하지만 사실은 다른 무언가였음이 밝혀진 어떤 실체가 어디론가 가버리면, 아이는 그 실체가 영영 안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요. 마치 자신의 팔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죠. 아이는 그 실체가 돌아오는 때를 자신이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돼요. 그러고 나서, 아이는 전에는 자신이었지만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된 이 실체에다 이름을 붙이게 되죠.』
엄마.
『바로 <엄마>예요. 이렇게 이름 붙여진 순간부터, 그 실체는 이방인이 돼요. 자, 여기에서 정신의 최초의 닫힘이 시작되는 거예요. 그 사랑의 에너지, 그 냄새, 그 향기, 그 경이로운 부드러움이 단지 이것으로 환원되어 버립니다. 자신과는 다른 어떤 존재, 하나의······ <엄마>로 말이죠. <엄마>······ 이 글자와 이 음향은 <어머니>라는 그 방대한 현상을 묘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지요. 그러고 나서 또 다른 실루엣에 <아빠>라는 이름표가 붙여져요. 또 그러고 나서 거울 속에 어떤 그림자가 나타나면서 세계는 다시 한 번 축소되지요.』
<카산드라의 거울> p.426

나와 앨리 그리고 쨍쨍은 식탁에 앉았다. 메뉴는 노랗고 하얀 계란 프라이와 빨간 방울토마토가 올라간 김치볶음밥. 아, 아보카도와 귤까지 올라가 있다. 뭔가 생소한 조합이었지만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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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일정이 어떻게 돼요?”

쨍쨍이 식탁 앞에 앉은 내게 물었다.

“특별한 일정은 없어요.”


“일정이 없는 게 일정이지. 그죠?”


특별한 일정이 없다고 답한 나는 쨍쨍의 특별한 일정을 돕게 됐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탄다는 그녀의 열차 예약을 해주게 됐다. ‘이런 생각보다 일이 커졌다.’ 예약 홈페이지를 붙잡고 씨름을 하다 보니 어느새 2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것 같다. 번역기와 지인의 힘을 빌려 겨우겨우 하나둘 퍼즐을 맞추듯 일정을 세워나갔다. 힘겹게 세운 일정이 쓰러지지 않도록 카드 결제로 받쳐주었다. ‘생각보다 비싸지 않은데?’하는 생각이 든 나는 이제 예약하는 방법도 알게 된 김에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생긴다.

히맨 이즈 인 제주_Day#8_20170502


히맨 이즈 인 제주_Day#8_20170502

고근산 - 쨍쨍랜드

20170502@쨍쨍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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