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자리에서 뛰고 지구가 돌아간다.

히맨 이즈 인 제주_Day#10_20170504

by 히맨

“언덕 뷰가 좋더라고 거기 구경 좀 하다 가도 좋고~”

돈내코 탐방 안내소를 지나 바로 나타나는 언덕까지만 잠깐 함께 걸을까 했는데, 어느새 수악길까지 함께 접어들었다. 그렇게 출발한 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다시 돌아가려면 좀 힘들텐데...’하는 생각이 들 때 쯤 뒤에서 앨리가 말했다.

“난 이제 가볼게”


앨리와는 하이파이브와 함께 고마움을 전하고, 각자 반대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이번 제주도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 덕분에 좀 더 많은 제주를 볼 수 있었다.


‘혼자다.’


뭔가 다시 자유로워진 느낌이랄까? 혼자만의 모드로 전환이 된 내 발걸음이 왠지 모르게 가벼워진다. 내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특히 이 한라산 둘레길에서는 거의 사람이 없다. 누군가에게는 단점일 수 있지만 내게는 큰 장점이다. 이런 연휴 기간의 제주도에서 이렇게 조용한 곳이 또 있을까?

“생각이 아주 많아지거나 아예 없어져서 좋아.”


이건 ‘도대체 왜 그렇게 달리는 거야?’ 혹은 ‘달리면 뭐가 좋아?’라는 질문에 항상 하는 나의 답변이다. 글쎄 그건 온전한 혼자만의 시간이기에 가능한 것 같다. 달리는 그 순간 세상 모든 것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나는 제자리에서 뛰고 지구가 돌아간다. 일정한 발걸음을 유지하는 것은 어찌 보면 상수(Constant)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 상수는 자기만의 고유한 속도, 바로 나만의 페이스다. 외력이 존재하기 전까지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건 카페에 앉아 사색을 즐기는 몸의 상태와도 같을 수도 있다는 거다. 그 상태는 온전히 고요하고 평온하다. 시력 또한 살짝 흐려지니 온갖 쓸데없는 것들을 배제하고 나에게 더 집중할 수 있다. 물론 일정 심박 이상으로 끌어올리지 않고 평온한 자신만의 페이스로 움직인다면 말이다. 그렇기에 나만의 페이스를 찾는 것은 나를 발견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수악길 또한 동백길과 비슷한 듯 매력적인 숲을 보여준다. 나는 이 두 구간을 한라산 둘레길의 메인 코스로 꼽고 싶다. 도로를 하나 건너 길이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건너 편에 한 정자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시선이 갔는데 현수막이 하나 달려있다.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경고를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여기저기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는 모습이 참 안타까웠다.

길에 다시 진입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오름으로 향하는 길이 보인다.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갈 수 있는 길은 모두 가보고 싶었다. 며칠 쉬엄쉬엄 놀았는데 간만에 일(촬영)을 해야겠다는 의무감도 10% 섞여 있었다. 이정표를 보고는 그때 처음으로 ‘악’이 오름을 뜻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길이 잘 정비되어 있는 물오름(수악) 코스는 다행히 길지 않았다.

오름 정상에 오르니 바닥에 앉아 있는 한 아저씨가 보였다. 관리하시는 분인 것 같았다. 그는 가던 길을 이어 내려가려던 나를 불렀다. 날씨 앱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지 내게 도움을 요청하셨다. 항상 문제가 생기면 검색을 통해 공부하듯 하나하나 해결하는 나는 속도가 빠르지 않다. 내 페이스에 영향이 생기지는 않을까 잠깐 당황스러웠다. 특히나 처음 만져보는 폴더형 스마트폰. 하지만 다행히 금방 방법을 알아내 어렵지 않게 해결해 드릴 수 있었다. 뿌듯. 인사를 드리고 하산을 시작하는데 문득 어르신 휴대전화 교육봉사를 하던 때가 떠올랐다. 처음 할아버지 할머니 대신에 어르신이라고 불러봤으며, 어르신들로부터 처음으로 선생님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열정이 가득했던 어르신들에 대한 편견도 깰 수 있었던 좋은 추억이었다. 리더로서 작지 않은 그룹을 이끌어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게 벌써 7년 전이라니...

수악길의 마지막 2~3키로 구간쯤인 것 같다. 양 옆으로 보이는 쭉쭉 뻗은 큰 나무들은 사려니숲길을 닮아있지만 길 자체는 전혀 지루하지 않은, 사려니숲길보다 훨씬 매력적인 숲길이었다. 앞으로 제주에 오게 되면 사람이 넘쳐나는 사려니숲길보다 이곳을 찾을 것 같다.


수악길이 끝나고 사려니숲길로 이어지는 부분은 제대로 안내가 되어 있지 않았다. 지나가던 아저씨는 이곳에서 이어지는 사려니숲길은 통제된 구간이라고 하신다. 길이 끊어진 임도에 앉아 네이버 지도와 한라산 둘레길 홈페이지를 오가며 마지막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했다.

‘통제구간으로 그냥 들어가 버릴까? 아니면 그냥 도로로 탈출해서 게스트하우스?’

해도 곧 질 시간이라 그냥 일단 도로를 따라 내려가 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동하던 중에 한라산 둘레길 안내판을 다시 발견하게 됐고 다시 이어서 걷기로 했다. 사려니숲길 통제구간을 우회하는 길을 만들어 놓은 임도였다. 다시 나타난 안내판과 한라산 둘레길 리본을 따라 잘 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놓친 것 같다. 이름도 생소한 머체왓숲길과 소롱콧길에 대한 안내가 나오더니 한라산 둘레길이 어느 방향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항상 말하지만 나는 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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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다시 뒤로 돌아가서 확인해볼까?’

하지만 나는 그런 거 잘 못한다. 치명적인 단점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했겠지만 혼자라면 뭐든 상관없다.

길이 겹치는 구간이라는 생각은 드는데 확신이 없었다. 일단 머체왓숲길 안내소방향으로 내려가 보기로 하고 이동하면서 만약을 대비해 잘만한 사이트를 스캔한다. 생각보다 짧지 않은 거리에 이제는 어두워져 이건 아니다 싶어 뒤로돌아 길을 잃은 위치로 돌아간다. 돌아가며 다시 사이트를 살핀다. 다시 돌아와 보니 평평하다 생각했던 임도 옆은 그다지 사이트로 매력적이지 않았다. 결국에는 다시 또 길에 들어서 아까 봐둔 계곡 옆 사이트로 이동한다. 나무 그네도 보이는 약간 울퉁불퉁한 그곳의 큰 나무 옆에 바짝 붙여 텐트를 친다.

‘내일 비 온다던데...’


‘휩쓸려 내려가는 건 아니겠지?’
히맨 이즈 인 제주_Day#10_20170504

히맨 이즈 인 제주_Day#10_20170504

돈내코 야영장 - 수악길 - 서중천

20170504@서중천 옆 나무 그네가 있는 평평한 어딘가

by 히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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