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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맨 Aug 31. 2017

나를 쓰다.

그리고 돌아보다.

사람들은 불안하다.

그래서 쓴다.


돈을 쓰고 관(冠)을 쓰고 마음도 쓴다.

쓰면서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재확인한다.

그리고 불안함을 해소한다.


그리고 나는 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쓴다.


몇 시에 일어났고, 무얼 먹었고, 무얼 보고 들었는지...

모든 변화는 그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다.


10년 전의 나는 이랬다.


나를 쓰는 일은 10년 전 군대에서 시작되었다. 나 역시 불안함으로 기록을 시작했다. 챙겨야 할 장비를 제대로 챙겼는지, 누가 훔쳐가지는 않았는지, 내가 잊은 할 일은 없었는지 불안했다. 내 생각과 감정을 끄적이기에는 어려서부터 일기에는 취미가 없었다. 그 시간에 잠을 좀 더 자는 게 좋았다. 그러한 이유로 단순명료하게 사실만을 적기 시작했다. 몇 시에 무얼 어떻게 했는지 사실을 그대로 다이어리에 옮기기 시작했다. 조금씩 디테일이 더해졌다. 그리고 그날의 야식까지 적기에 이른다.

기록을 시작하던 때를 돌아보고 싶어 그때의 기록을 펼쳤다. 우연히도 10년 전 이맘 때의 나를 펼쳤다. 누구든지 이걸 보면 그 때의 나를 객관적으로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기록은 내가  어떤 야식을 받았는지도 친절하게 알려준다.


대학생 시절 국가기록원의 서포터즈로 활동한 적이 있다. 그 때 처음 내가 지금껏 써온 기록들이 나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써온 것들의 소중함을 느끼고 나 라는 존재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의 중요함을 알고 있었음에도 펜과 수첩을 놓아 버린 때가 있었다. 티베트의 고산에서 나의 기록은 물론이고 우리 팀의 소중한 기록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그 때의 아쉬움과 미안함이 지금의 PCT 기록을 있게 했다.


내가 기록을 놓는 순간은
내가 쓰러져 정신을 잃었을 때 뿐이다.


퍼시픽크레스트트레일. 4300km의 산 길을 걷는 175일 동안의 나의 여정을 하루하루 악착같이 썼다. 어느 한 순간도 한 눈팔지 않고 나를 썼다고 자신할 수 있는 내가 멋지고 자랑스럽다. 하지만 이번에는 순수하게 나를 쓰는 것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1등 혹은 최초를 추구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어떤 의구심이나 이견을 내놓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리고 싶었다.


‘증거를 만들자.’


사실은 이것이 내 마음 속 첫 번째 이유였다. 아마도 불안한 나의 현실 때문이었을 거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불안하다. 조금이라도 나를 들여다 봐주는 사람들을 통해 나의 불안함을 달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봐주기를 바라고 있다.

PCT 7~8일 차의 기록(20150421~20150422)
 PCT를 함께 걸은 희종이 형에게 길 위에서 전달한 메시지들


그저 나 이길 바란다.


보는 사람마다 다른 모습의 내가 그려지길 원하지 않는다. 그건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니니까. 보는 사람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사진이나 그림보다도 살아 움직이는 표정과 목소리의 떨림으로 가득한 영상을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PCT 첫 날의 기록


지금 나는
나를 다시 쓰고 있다.


그 길 위에서의 PCT 하이커 히맨을 되돌아본다. 내 기억과는 다른 사실들이 드러나고 미화된 기억들이 수정된다. 그 때 했던 나의 생각을 반대하기도 한다.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울컥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그 길에서 나는 누구보다 더럽고 거지같았지만 누구보다 행복했다는 사실이다.


지금 나는 그 때의 나를 다시 쓰고 있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길에 나설 사람들을 위해서 쓴다. 또 나의 길을 알리기 위해서 쓴다. 나의 피와 땀의 기록만큼은 내가 걸은 길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읽히길 원한다.

하이커 트래쉬(Hiker Trash) 히맨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나를 쓰는 일은 거울 앞에 서는 일과 같다.


by 히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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