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맨 Sep 03. 2017

거울에 비친 그 남자의 얼굴이 되게 멋져 보였다

DMZ 트레일 러닝 50K


#1

처음에는 역시 힘이 넘쳤다.

초반부터 시작된 짧지 않은 급경사 오르막을 오르며 한 사람 한 사람씩 제쳐나가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한 외국인 여성 러너가 보였다. 검은색 티셔츠의 등허리에 새겨진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I♥PAIN'

내 머리 속에도 깊이 새겨지는 듯했다.

가장 먼저 '우와!'했고, 그다음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2

'아~ CP2까지만 가서 그만둘지 말지 결정하자'

첫 체크포인트(CP1) 이후로 급격하게 체력은 떨어졌고 역시 예상대로 쉽지 않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포기를 염두에 두고 달리는 꼴이라니... 서글프지만 이제는 냉철하게 판단하고 단호한 결정을 해야 할 때라는 생각도 들었다. 발바닥이 아파 제대로 훈련도 하지 못했고 최근들어 영양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더이상 내 정신력만으로 부족한 몸을 이끌고 가는 일은 가능하면 하지 말자는 생각도 종종하던 터였다. CP2는 정말 멀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만둔다해도 어쨌든 거기까진 가야했기에 힘을 짜내며 꾸역꾸역 도착했다. 뛰면서 생각났던 수박이 있었고, 전혀 생각지 못한 레드불도 한가득 쌓여있었다. 레드불 2캔을 포함해 수박을 정신없이 흡입했다. 자연스레 조금씩 포기에 대한 생각이 옅여진 것 같다. 고프로 배터리를 갈았고, 에너지 젤을 주머니에 다시 채웠다. 마지막으로 다시 출발하기 전 화장실에 들렀다.

화장실 벽에는 작은 거울이 달려있었다. 거울 속에는 한 남자의 얼굴이 한가득 보였다. 다 죽어가는 지친 모습에 졸린 눈을 하고 있을 줄 알았던 남자는 의외로 오히려 눈이 커진 채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문득 거울에 비친 그 남자의 얼굴이 되게 멋져 보였다. 이 모습을 남기고 싶은데 고프로 배터리는 바닥이었고, 스마트폰을 꺼내기는 너무 귀찮았다.(시간도 아까웠고) 무엇보다 셀카는 뭔가 맛이 안 난다.


'적어도 결승선에선 누군가 날 담아주겠지'


이 멋진 모습을 누군가 담아 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다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못가 다시 걸었지만 말이다.


#3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비록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꽤 많은 구간을 걷기는 했지만 CP를 제외하고는 멈춰 서지 않았다. 멈추지 않은 것은 지금껏 달린 트레일 러닝 대회 중 처음이다. 그동안은 각종 이유들로 멈춰 쉬기를 반복했었다. 아주 많이 우려했던 발바닥 통증은 생각보다 버틸만 했던 것도 한몫했다. 장거리 훈련을 하지 못해 근지구력이 많이 떨어져서 중반부터 완전히 퍼졌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서킷트레이닝 등으로 보강 운동을 한 것도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이제 다음엔 걷지 않고 뛰어나가는 거리가 더 늘어날 것이다.


#함께 출전한 '우리' 모두 무사 완주해서 좋다!^^

20170902 DMZ 트레일 러닝 50K

by 히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