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트래킹, 드디어 시작이다!
(2012년 4월 네팔 여행 당시 쓴 일기를 바탕으로 쓴 글과 사진이오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트래킹을 시작하는 날. 아, 갑자기 심장에 통증이... 나는 건 억지고, 엄지발가락이나 발바닥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당장은 걸을 수 없는 작고 결정적인 종기가 나서 트래킹 안 가고 포카라에서 그냥 뒹굴거렸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기도를 했... 으나 신은 들어주지 않았다. 하긴, 나 같아도 안 들어주겠네. 흥.
5시에 일어나서 오늘도 역시 상큼한 냉수마찰을 하고 잠에서 번쩍 깨어 6시까지 짐을 정리한 후 6시 반에 숙박비를 정산하며 짐을 맡겼다. 트래킹을 마치고 와서 다시 머물 거라 하니 기꺼이 맡아 주었다. 고맙다, 정말. 아직까지 훈훈한 인심이 남아있구먼.
6시 40분쯤 산촌 다람쥐에 도착했다. 오늘부터는 주야장천 걸어야 하니 든든하게 아침밥을 먹기로 하고 김치찌개에 계란찜을 시켜서 먹었다. 당시 산촌 다람쥐를 둘러싸고 어떤 소문 하나가 돌고 있었는데, 사실 산촌 다람쥐 밥은 별로지만 다들 도움을 하도 많이 받아 미안한 마음에 밥을 먹으러 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 그 소문의 진위를 확인한 결과... 노코멘트! 궁금하면 드셔 보시길.
밥을 먹는데 우리의 포터인 선검을 소개받았다. 미리 말하지만 트래킹 하는 내내 가이드로서도 포터로서도 정말 실력 좋고 과묵한데다 책임감도 강했던 멋진 남자 선검이었다. 이 마성의 포터 선검이여!! 그리고 기사인 리비 아저씨와도 인사했다. 인상이 참 좋으신 분이었다. 엄마 아빠는 옆 테이블에 앉으셨던 중년의 부부와 인사를 나누며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분들은 이미 트래킹을 마치고 돌아와 포카라에서 쉬는 중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싼 짐이 엉성해 보이셨는지 출발까지 남은 그 짧은 시간 동안 배낭을 다시 잘 싸주셨다. 정말 이번 여행에는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8시 30분, 택시에 올랐다.
나야풀까지 택시비는 1500루피. 한국에서 십 년 넘게 생활하셨다는 리비 아저씨의 한국말 실력이 장난이 아니다. 유머 감각까지 갖추신 아저씨와의 대화가 즐거우셨던지 엄마랑 아빠는 내내 리비 아저씨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시고, 선영이는 옆에 앉아 저 멀리 보이는 마차푸차레 설산을 보고 감동해서 벌써부터 손가락에 쥐 나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 나는 원래 어떠한 이동 수단이든 일단 타면 멀미라는 병마가 나를 덮치는 덕분에, 입을 헤- 벌리고 멘붕이었다. 멀미는 국가를 가리지 않는구나. 꺼이꺼이. 그래도 다행히 날씨가 너무 좋고 하늘이 맑았다. 리비 아저씨가 센스 있게 신나는 한국 노래를 틀어주셨다. 들뜬 엄마 아빠와 선영이, 심지어 멀미로 정신이 혼미한 나까지 모두 있는 힘껏 푸춰핸접! 참, 리비 아저씨께 안나푸르나에 가보셨냐고 여쭤보니, 아저씨께서 의아한 듯 "우린 산에 안 가요, 왜 가요?"라고 하셔서 그만 빵 터지고 말았다. 하긴, 생각해보니 나도 한강 유람선 안타요. 그래요, 그러네요.
한 시간 걸려 9시 30분쯤 나야풀에 도착했다. 선검이가 우리 대신 가방에 씌울 비닐 구입하는 걸 도와주었다. 비가 오면 필요하다는데, 부디 필요할 일이 없기를. 사실 이건 비밀인데 나는 태양을 부르는 여자다. 비 오는 날을 워낙 싫어해서 하늘에서 내가 돌아다니는 날은 어지간하면 비를 안 내려주신다. 호호. 이번에도 부디, 하느님 도와주세요. 착하게 살겠습니다!!
10시, 드디어 출발이다.
시작은 너무도 완만한 길. 덕분에 선영이랑 가방도 번갈아 들면서 신나게 오르고 또 올랐다. 솔직히 이 정도면 제법 할만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편하고 고운 길이었다. 거기에 2~30분 간격으로 빵-빵-사탕-육포-양갱... 쉴 틈 없이 먹어대니 애초에 트래킹에서 유일하게 기대했던 다이어트 효과조차 기대할 수 없다는 절망감마저 들 정도였다. 정말 아주 안정되고 배부른, 즐거운 산행이 이어졌다.
11시가 조금 넘어 힐레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힐레는 중간 경유지로 원래 여기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아직 네팔 음식에 적응이 안되기도 했거니와, 입맛이 별로 없어서 가볍게 오믈렛을 먹었다. 하긴, 여기서 입맛이 있으면 나는 정말 인간이 아니다. 걸으면서 워낙 이것저것 먹었어야 말이지.
오전의 간식과 오믈렛의 에너지로 다시 힘을 내 산행을 시작했다. 그런데 지나치는 마을마다 잔치 준비로 분주했다. 선검에게 물으니, 다음날이 네팔의 새해라 그렇다고 했다. 오-! 네팔의 새해라니. 그런 때 안나푸르나를 오르는 우리는 정말 운이 좋다, 덕분에 네팔 축제를 원 없이 보겠다, 고 이야기하던 찰나였다. 뭐가? 어느 마을에 발을 디딘 것이. 그게 뭐? 그러니까... 마을에 발을 디디자마자 축제를 위해 살아있는 소의 목을 잘라 목 없는 소가 발을 바둥거리는 풍경을 본 것이... 그때란 말이다. 소 다리를 먼저 보고 고개를 올렸을 때 머리가 있을 자리에 아무것도 없는 순간의 충격은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하... 뭐, 이런...이라는 생각을 먼저 했던 것 같다.
음, 일단 놀랐다. 조금 지나니 그 모습이 징그럽기도 하고, 또 소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물론 들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이곳의 풍습을 이러니 저러니 하면 안 되겠구나 싶었다. 나는 네팔에 대해 전혀 모른 채 왔고, 저 풍습이 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본 한 단면만 보고 그곳의 전체를 판단하지 말 것, 내가 살아온 곳의 습관을 그곳에 함부로 들이대지 말 것, 이해할 수 없다 해서 멋대로 부정하거나 함부로 비난하지 말 것. 내가 여행하는 내내 나 자신에게 했던 약속이다.
여러 생각이 교차하던 마을을 지나니 드디어 울레리까지 죽음의 코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예정으론 2일 차에 갈 예정이었던 그 고난의 길이 들뜬 우리의 빠른 걸음 덕분에 조금 앞당겨졌다. 폭이 좁고 높은 돌계단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이어지고 이어졌다. 고개를 들면 끝이 안 보이는 계단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의욕을 꺾기 때문에, 그저 발끝만 바라보며 오르고 또 올랐다. 나는 자꾸 눈물이 나고 콧물이 나고 땀도 나고 개기름도 나고, 거기에 동공은 흔들리는데 유문은 수축되고 괄약근이 조여지면서 모공은 넓어지는데다, 손이 떨리고 눈꺼풀도 떨리고 다리도 떨리고 몸도 떨리고... 이런 순간에 말하고 소하고 나귀는 똥을 풍풍 싸며 산을 오르는데 이 아이들이 미친 듯이 싸놓은 똥에 꽃은 피고, 이런 빌어먹을! 트래킹 하면 푸른 하늘 올려다보며 걸을 줄 알았는데, 똥이 너무 많아서 발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이 계단과 똥의 이중주는 펼쳐지고. 아오!!!
그런데 연로하신, 줄로만 알았던 엄마 아빠가 막 가볍게 산을 오르고 선영이는 완전 백두산 호랑이처럼 슉슉 그림자도 안 보이게 산을 넘고. 나만, 나만, 나만, 어후. 난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정말 숨이 꼴깍 넘어가려는 순간, 앞서 가며 나를 위로하던 선영이가 갑자기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다. 고산병 증세에 두통이나 구토는 있어도 미치는 건 없었는데, 혹 공기에 웃음 가스라도 섞였나 싶어 고개를 들어 선영이를 보았다. 그리고 선영의 눈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만 나도 소리를 내서 크게 웃고 말았다. 저 멀리서 어떤 백인 남자가 정말 얼굴이 흘러내릴 듯한 표정으로 지쳐 서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울지 않는데도 얼굴이 막 울고 있었다. 많이 힘들지, 하며 말을 거니 숨을 헐떡거리며 곧 죽을 듯한 목소리로 정말 힘들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독일에서 온 그는 오늘 내로 포카라로 돌아가기 위해, 남들 이틀 코스를 하루 만에 내려가려다 멘붕이 왔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그의 모습이 나에겐 큰 위로가 되었다. 계단이고 똥이고 뭐고, 모든 피로가 덕분에 싹 잊혔다. 잠시만 잊혔다. 아주 잠시만 잊혔을 뿐, 그와 인사하자 다시 돌계단과 그 위의 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콜릿 하나로 돌계단 열개를 오르고 사탕 한 알로 돌계단 다섯 개를 넘으며 그렇게 힘겹게 힘겹게 겨우 울레리에 도착했다.
울레리에 숙소를 잡으니 계룡산에서 18년간 도를 닦은 것처럼 수염도 머리도 길게 기른 백인 남자와 그에게 푹 빠져 우리에겐 관심도 없는 수다스러운 주인 언니가 있었다. 우리는 옷을 갈아입고 잠시 쓰러져 있다가 곧 덮친 허기에 밥을 먹기로 했다. 메뉴판을 열어 우리 눈 앞에 펼쳐진 산해진미를 바라보았다. 배고픈 마음에 침까지 질질 흘리며 피자도 시키고 어니언 수프도 시키고 프라이 누들도 시키고 매쉬드 포테이토도 시켰다. 나는 먹어야 했다. 다이어트고 나발이고, 먹지 않으면 당장 내일 한 발짝도 못 움직일 것 같았다.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이 천년처럼 흘렀다. 나는 피자를 손으로 들고 한입 크게 베어 무는 상상을 했다. 이제 곧, 이제 곧!!!
그래, 곧 음식이 나왔다. 아니, 음식처럼 생긴 게 나왔다. 그러니까... 어... 이 언니는 음식을 글로 배웠다. 아니다. 아니다. 그림으로 배웠다. 그냥 사진을 얼추 보고 자신이 가진 재료로 모양만 만들어냈다. 우리가 시켰던 메뉴판에 음식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니언 수프는 간장국이었고, 피자는 산나물 간장절임 모둠이었으며 누들도 간장 누들. 매쉬드 포테이토는 간을 하지 않은 초특급 웰빙. 맛있는 건 핫초코 하나였다. 다행히 내 입맛이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뭐든 안 가리고 잘 드시는 아빠도, 편식은 평생 해본 적 없다는 선영이도 채 몇 입 못 뜨고 포기했다. 결국 우리 모두 입맛을 잃었고, 특히 한 입도 제대로 먹지 못해 오믈렛을 별도로 시킨 나는 그마저도 다 못 먹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아... 배고프다. 꺼이꺼이.
그때였다. 식당에서 숙소로 올라가던 길에 계단 옆에 있던 발코니에 잠시 섰는데 설산이 보였다. 네 명이 모두 모여 설산을 바라보았다. 저 아름다운 곳에 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니, 그런 생각을 하자 조금씩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가방 속에 고이 챙겨갔던 칼로리바가 생각나 급히 들고 왔다. 우리는 함께 칼로리바를 야무지게 뜯어먹으며, 질리도록 설산과 그 위로 붉게 덮이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이 여행에 다이어트보다 더 좋은 이유가 생긴 것 같았다. 저 하늘, 저 노을, 그리고 저 산. 이 아름다움이 충분한 이유가 되겠구나.
오늘 산에 오르며 새삼스레 깨달은 것이 있다. 걷는 동안 누구도 내 짐을 들어줄 순 없다는 것, 오늘 많이 걸으면 내일이 편하다는 것, 이왕 시작했으면 결국 올라가야 끝이 난다는 것, 시간은 저마다 다르게 흐른다는 것. 그래도 다시 오라면 안 올 거라는 것!!! 뭐, 이런 다짐마저도 모두 추억이 되겠지만...
트래킹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산은 춥다며 두꺼운 침낭을 챙겼다. 덕분에 트래킹 하는 동안 그 침낭 위에 이불도 덮고, 안에는 기본 취침 복장에 히트텍까지 위아래로 껴입고 잤다. 거기에 남대문 이여사를 표방하며 회계에 나섰던 나는 배에 복대마저 찼다. 그러니 산에서 자는 내내 숨 막히고 깝깝해서 자다가 일억천만 번씩 깰 수밖에. 더구나 이 날은 6시 조금 넘어서 잠들었는데 한 여덟 시부터 그만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깨고 말았다. 너무너무 어둡고 뭐, 조금 무섭기도 하고 시간도 잘 모르겠고 그래서 참고 또 참았다. 그런데 선영이가 갑자기 쓱 일어나서 머리에 헤드 랜튼을 끼고 화장실로 가려고 했다. 그래서 나도 따라갔다. 좀비처럼 따라 일어서는 나를 보고 선영이가 화들짝 놀랐다. 미안, 선영.
둘이서 나란히 화장실 다녀와서 자려는데 옆 방에서 아빠가 몇 시냐고 물으셨다. 11시라고 대답했더니 왜 11시냐고 따지셨다. 11시라서 11시라 대답했는데 왜 11시냐고 물으시면... ㅠㅠ 괜히 억울했다. 여하튼 그 상태로 다시 두시에 깨고 새벽 네시에 깨다가 결국 다섯시 반까지 잤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