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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제 길

오, 나의 네팔!

열. 지혜의 산, 그 아래 우리

by hearida

(2012년 4월 네팔 여행 당시 쓴 일기를 바탕으로 쓴 글과 사진이오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2,600m에서 1,900m까지 내려가는 날.


눈을 뜨니 5시 10분이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일어날 생각은 접어두고 하늘만 하늘만 바라본다. 그러다 그만 선검의 재촉에 6시에야 겨우 침낭 밖으로 나온다. 새벽 산 바람이 몹시 찼지만, 그래도 용기 내어 건물 밖 수돗가에서 찬물로 세수도 하고 양치도 하며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을... 이랄까 인간적 양심을... 이랄까 지켜냈다. 산이라고 아무리 자기 위안을 삼아도, 이 끕끕한 느낌과 더불어 사람들과 눈 마주칠 때마다 덮쳐오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 있어야 말이지.



7시가 되어 아침 식사로 치즈 토스트랑 프렌치토스트, 이제 말 안 해도 척척! 핫초코를 먹는다. 혈중 초코 농도 100% 달성. 피에서 달달한 냄새가 날 것 같다, 진심. 그래도 이 핫초코를 마셔야 하루의 첫 발이 떼어지니 산행을 마칠 때까지는 핫초코를 버릴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의미로 원샷, 크하!


마을을 나서려는데 몇 사람이 다가오더니 자기 마을에 대해 일장 연설을 시작한다. 서론이 길고 길었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기부를 하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이곳은 웬일인지 어제부터 내내 우리를 돈으로만 바라보는 것 같다. 지금까지 거쳤던 마을에서는 한 번도 없던 일이었는데, 마음이 편치 않다. 시작부터 끝까지 돈으로 시작해 돈으로 끝나는 느낌이랄까. 물론 우리 역시 이 아름다운 산과 이 산을 지켜온 사람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가득하고, 당연히 즐거운 트래킹을 할 수 있었던 데 대한 보답도 하고 싶다. 하지만 이렇게 마음 불편한 강요는 그 답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트래킹 하는 길 곳곳에 네팔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짓는 모금을 하고 있었다. 기부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곳에 하기로 하고, 길목을 막아서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하루의 트래킹을 시작한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위로 위로 갈 때는 그리도 힘들었는데 신기하게 아래로 아래로 갈 때는 제법 괜찮다. 역시 난 높은 곳은 어울리지 않나 보다. 회사 다닐 때도 승진할 때마다 마음이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다. 스트레스성 위염과 두통을 달고 살다가 기어이 사표를 내던지고 백수가 되던 날, 걱정하는 사람들이 무안할 만큼 환하게 웃던 내가 떠오른다.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회사는 없다, 며 가난한 통장이 일상이 돼버린 지금이 나는 그 어떤 높은 직함보다 행복하니 천상 낮은 곳에서 살 팔자인가 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비탈진 언덕길을 쉭쉭- 마구마구 날다람쥐처럼 내려간다. 아, 가히 신 들린 발걸음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오르막과 비교하여 쉬웠다는 거지, 사실 내려가는 길이 아주 편한 건 아니었다. 반대로 이쪽 길로 올라왔다면 진짜 목적지까지 다다르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선영이가 카트만두에서 우연히 알게 된 스님께서 선영이에게 이 코스로 올라가는 게 더 편하다 하셨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스님께서 선영 중생에게 더 깊은 깨달음을 주시려고 거짓말을 하신 건 아닌지. 커커. 선영이는 옆에서 기만당했다고 웃음 섞인 불평을 한다.



10시 45분이 지나 간드룽에 도착했다.

간드룽은 지금껏 지나친 마을 중에서도 가장 큰 마을이었다. 평화롭다, 는 단어가 제일 먼저 머릿속을 스친다. 노오랗고 파아란 페인트가 곱게 칠해진 예쁜 게스트 하우스에서 머물게 되었다. 등 뒤의 마을 풍경도, 눈 앞의 숙소도 마음에 쏙 들어 행복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숙소 안으로 들어가자 더 좋은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이, 따신 물이 나온다는 것. 그리하여 4일 만에 드디어 머리를 감았다. 이렇게 감사할 수가. 만쉐이. 그러나 여전히 내 머리를 강타하는 찬물의 슬픔이란. 그러니까 여기서 새롭게 배운 것은, warm이란 차지만 적당히 찬물이며 hot은 따뜻한 물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얼음물이 아닌 게 어디냐며 오랜만에 샴푸 냄새 폴폴 나는 머리를 좌우로 마구 흔들어대다 점심시간을 맞이했다.



점심으로 시킨 건 네팔의 전통식인 달밧에 치킨 카레를 더한 것, 그리고 초콜릿 팬케이크와 프라이드 포테이토였다. 하고 끝날 줄 알았나욤? 핫초코도 시켰지요. 산을 벗어날 때까진 포기할 수 없는 핫초코. 하하.


배불리 식사를 하고 선검이와 함께 다 같이 간드룽 마을을 구경하기로 했다. 간드룽은 고즈넉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어 정말 좋은데 안타깝게도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같은 마을이지만 높고 낮음의 차이가 너무 크달까 길달까 높달까. 여하튼 선검이는 자꾸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며 올드 간드룽을 구경시켜줬다. 자꾸 내려갈수록 다시 올라올 때 어쩌나 싶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호박만 한 다리 알이 수박만 해진다 해서 별 차이도 없겠지. 에라이, 어디 마음껏 굵어져 봐라! 내 다리야! 아오!



간드룽은 마을이 크다 보니, 마을 안에 예전 풍습이 남아있는 문화도 말도 다른 올드 간드룽이 있다고 한다. 올드 간드룽에 가기 전에는 조금 왁자지껄한 모습을 기대했는데, 가보니 되려 너무 스산하고 피폐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손을 내밀어 구결을 한다. 어린 남매가 내민 손이 너무 안 쓰러 주머니에 있던 사탕을 건네니, 저 멀리 앉아있던 자기 엄마에게 전해주고 다시 손을 내민다. 아이들의 고사리 같은 손도 우리의 안쓰런 표정도, 선검은 무심히 스쳐 저만치 앞서 간다. 지금 내 마음속에 부딪히는 많은 생각들도, 이 아이들의 무구한 눈빛도, 선검의 쓸쓸한 뒷모습도 뭐라 명확히 정리할 수도 결론 내릴 수도 없는 복잡한 미로 속에 갇혀있는 것 같다. 나는 언제나 착하게 살고 싶었지만, 착하다는 건 무엇인지. 돕는다거나 베푼답시고 내가 내민 값싼 동정 같은 것이 오늘 내가 본 이들의 현실 앞에서는 그저 저 봉우리 너머로 흩어지는 바람보다 차갑고 구름보다 가벼울 뿐... 돌아오는 발걸음이 모두 무겁기만 하다.



산책을 마치고 마당에 앉았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그림같이 아름답다. 우리는 멍하니 이 비현실적인 풍경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생각에 잠기다가 또 왁자지껄 이야기를 반복했다. 어디선가 하얀 말이 나타나 마당에 자란 풀들을 뜯어먹는다. 엄마가 가만히 입을 떼어 말씀하신다. 이 산은 지혜로워 이렇게 모든 생명을 살게 돕는다고. "지혜로운 산"이라고 나도 따라 말해본다. 말이 퍼지는 곳에 닿아있는 저 하늘의 색과 곁에 서 있는 말과 내가 한 공간 안에 있는 것이 기묘하게까지 느껴진다. 언젠가 먼 훗날 이 트래킹을 떠올리면 어쩐지 오늘 이 모습이 떠오를 것만 같다.



3시 40분쯤 방으로 올라가서 쉬다 4시 반에 다시 로비로 내려왔다. 창가에 앉아 블랙티를 마시며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때 창밖에 어린 동생을 업은 작은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1달러를 달라고, 아니면 사탕이라도 달라고 말하는 조그만 입이 너무 조심스러워 마음이 내려앉는다. 거뭇거뭇 때가 탄 얼굴 가득 커다란 눈이 너무 맑아 그만 울컥하고 만다. 이 아이를 보고 불쌍하다, 하고 생각하는 것마저 미안해진다. 엄마와 아빠의 얼굴에도 안타까운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여린 선영이의 눈에는 벌써 눈물까지 고인다. 우리는 얼마의 돈과 사탕을 손에 쥐어주면서도 자꾸 미안하기만 하다. 이 미안함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저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몇 푼의 돈보다 사탕보다,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하여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이렇게 말하면서도 채 말로 풀어내지 못하는 어지러운 마음이 가득한 오늘이다.


저녁을 먹고 자러 가려는데 선영이가 잠시 나가자 권한다. 건물 밖을 나서니 하늘에 별이 총총, 정말 쏟아내릴 듯 가득하다. 가만히 올려다보며 북두칠성, 북극성, 카시오페아... 몇 없는 아는 별자리를 세어본다. 진작 별자리를 더 알아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름 모를 별들에게 빌어본다. 이 아름다운 산 아래 자리 잡은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그리고 나에게 이 흐린 머리를 맑게 할 지혜를 조금이라도 주기를.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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