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제 길

오, 나의 네팔!

열하나. 드디어, 돌아오다!

by hearida

(2012년 4월 네팔 여행 당시 쓴 일기를 바탕으로 쓴 글과 사진이오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단잠을 자는데 쿵쿵- 큰 소리가 들린다. 산사태라도 났나 싶어 급히 눈을 뜨니 아빠가 방 문을 두드리시는 소리. 시계 바늘은 5시 반을 향해 간다.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치켜뜨며 일어선다. 입가에 침 자국을 닦으며 문을 여니 엄마 아빠가 복도 발코니에 서서 손짓하신다. 가까이 다가서니 안나푸르나 마챠푸차레 3봉이 모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떠나는 날까지 산은 나에게 선물을 주는구나, 감동이다. 안개도 구름도 벗어버린 설산의 민낯이 너무도 아름답다. 도도하게 솟은 봉우리와 매끈한 곡선과 반짝거리는 하얀 눈의 빛깔,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으니 더한 축복이 없지 싶다. 문득, 나도 드러날수록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얼굴이든 마음이든 생각이든 말이다.



넷이서 한참을 입 벌리고 바라보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린다. 아직 마쳐야 할 산행이 남아있으니. 각자 방에서 씻고 다시 짐을 싸 로비로 내려간다. 이어지는 아침식사는 치킨 커리와 블랙퍼스트 세트, 팬케이크 위드 허니, 에그 베지터블 볶음밥.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이고 싶은 핫초코까지. 모두 6,312루피나 나왔다. 마지막 날이라고 아주 다들 미쳤네, 미쳤어. 허허.



8시가 되자 선검이 앞장선다. 오늘도 출발.

내려가고 내려가고 내려가고 내려간다. 참 높이도 올라왔구나 싶다. 하지만 지금 나를 괴롭히는 건 끝없이 이어진 내리막길이 아니다. 그럼 뭐냐? 바로 더위다. 아, 정말 진심으로 매우 많이 몹시 덥다. 쨍쨍한 햇살 덕분에 드러나있는 살들은 모두 거멓게 타버렸다. 특히나 폴대를 쥔 손은 참 더럽게 타 버리고 말았다. 풀어 설명하자면, 폴대를 쥐었을 때 위로 보이는 엄지와 검지 사이의 움푹 들어간 부분이 집중적으로 타서 꼭 때탄 것처럼 보이고 있다. 누가 보면 저 여자 씻지도 않는다고 혀를 끌끌 찰 만큼 현실감 넘치는 때를 가장한 태닝이랄까. 아, 이런 리얼리티를 바란 게 아닌데... 흑흑.



11시쯤 쉬어갈 겸 가게에서 차를 마시기로 한다. 가게 앞에서 똘망똘망 야물딱지게 귀여운 두 아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다. 아빠는 밀크티, 선영이는 콜드 레몬티, 나는 스프라이트다. 엄마는 진저 티를 시켰는데, 덕분에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한참 형과 공놀이를 하던 둘째가 엄마가 주문을 하자 갑자기 가게 앞 절벽을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놀라 눈만 껌뻑대고 있는데, 곧 한 손에 갓 캔 생강을 들고 다시 돌아온다. 와, 이게 바로 산지 직송 프레쉬 오가닉 진저 티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엄마는 기쁜 마음으로 마지막 한 모금까지 탈탈 털어 마신다. 늘 몸이 약한 엄마가 걱정인데, 저 진저 티 안에 엄마 몸을 백배는 건강하게 해줄 튼튼한 기운이 담뿍 들어있는 것만 같다. 고마운 마음에 주머니에 남아 있던 사탕 몇 알을 건네자 엄마 아빠, 그리고 형까지 주고서야 겨우 자기 입에 한 알을 넣는다. 오늘도 마음에 고운 풍경이 또 하나 새겨진다.



다시 하산을 시작한다. 내려가면서 이제 갓 트래킹을 시작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한다. 왠지 마음속으로 측은지심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그래요,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마음껏 웃으세요. 곧 얼굴로 울게 되는 날이, 크흡! 혼자 이런 생각을 하며 피식 피식 웃는 나를 두고, 선영이는 갑자기 봉지 하나를 꺼내 가방에 맨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길가의 쓰레기를 주우며 내려간다. NGO에서 일하고 싶다며 눈을 반짝이던 선영이의 지난밤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 선영이라면 분명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용히 쓰레기를 줍는 그녀의 등을 보며 생각한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선영이의 쓰레기 봉지 위로 아이들이 몰려든다. 아마 음식이나 사탕인 줄 알았나 보다. 이건 먹는 게 아니라며 아이들을 물리는 선영이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빛이 감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 눈가도 시려온다. 급한 대로 가진 사탕과 초콜릿 전부를 탈탈 털어 나누어주지만 이게 답이 아니란 걸 모두 알고 있다. 어제부터 우리를 뒤흔들던 그 많은 고민들이 오늘도 끊이지 않고 따라온다. 아마 이 고민들이 어떠한 형태로든 실천으로 이어질 때까지 무거운 마음은 내려가지 않을 것 같다.


12시쯤 지나 점심을 먹기로 했다.

레몬티랑 커리, 그리고 팬케이크 위드 허니가 두 개. 네팔 꿀이 맛있다며 있는 대로 벅벅 긁어먹는다. 주 40시간 근무를 기준으로 일벌 천마리의 한 달치 꿀 정도는 박살 낸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우리는 귀국 후 한 특종 보도를 보게 되는데, 네팔 꿀이 사실은 되게 비위생적이고 건강에 안 좋다나 뭐라나. 그걸 보고 나니 갑자기 배가 꿀렁꿀렁 아파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랬다는 슬픈 이야기.



점심을 먹고 힘을 내어 다시 걷는다. 어김없이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그렇게 한 시간 반 여를 걸었을까. 처음 트래킹을 하며 건넜던 철로 된 다리가 보인다. 오,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그러니까 드디어! 도착이다! 맙소사. 다 왔다. 진짜 다녀왔다. 나 다녀왔다고. 나 안나푸르나 올라갔다 왔다고. 내가, 그러니까 내가 말이야. 저기 3,210m를 찍고 이렇게 멀쩡하게 내려왔단 말이다. 믿기는가? 나는 안 믿기는데. 으하하. 옆에서 안 믿긴다고 혼자 계속 중얼거리니까 엄마가 볼을 힘껏 꼬집어준다. 아, 아프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뭐, 아픈 걸 보니 진짜구나. 나, 다녀왔다!!! 그리고, 있지. 다신 안 갈 거거든!!! 끝났어, 오예!!!


리비 아저씨가 마중 나와 계신다. 푸근한 아저씨 미소를 보니 진짜 내려온 게 실감이 난다. 조그만 포니 택시에 나와 선영이, 엄마와 아빠에 선검이까지 탔다. 알아서 가겠다며 한사코 마다하는 선검이었지만, 선검이가 선검이인 이상 당연히 함께 가야만 한다. 비좁은 차에 꾸겨 타고 가는 것쯤 기꺼이 좋다 할 만큼 선검이는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이니까. 뒷자리에 선검이 타고 그 옆자리에 선영이가, 옆에는 내가 엄마를 무릎에 태운 채 포니가 달리기 시작한다. 차 안은 이야기 꽃이 활짝 피었지만, 나는 피로와 멀미로 입을 하마만큼 벌린 채 잠들고 말았다.


마을에 다 도착할 즈음되자 선검이와도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아빠가 우리에게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등산복과 등산용품을 선검이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건네신다. 감사의 표시로 약속한 보수에 팁도 더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한 돈을 줘도 그 고마움을 갚을 길 없는 고마운 선검이다. 아쉬움 가득한 인사를 나누고 메일 주소도 주고받으며 기약 없는 만남의 약속을 나눈다.


도중에 3일 뒤 카트만두행 버스를 예약하기 위해 그중 괜찮다는 스위스 버스 앞에 내렸다. 네 명의 버스값이 400루피다. 솔직히 나는 그냥 올 때처럼 비행기를 탔고 슁- 갔으면 싶은데, 나머지 세 사람이 꼭 버스를 타보고 싶다고 난리다. 그럼 나 혼자 비행기 타고 갈 테니 그렇게들 하시라고 했는데, 여기까지 와서 다양한 탈 것을 경험해보면 얼마나 좋냐고 반 협박을 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그러자 했다. 아니, 참 내. 뭘 더 얼마나 더 경험하고 싶은 겁니까. 대체.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왜 열어본 건지 이해가 안 되는, 하지 말라는 건 안 하고 내 몸의 안위가 가장 중요한 정말 인간적인 인간이다. 이런 인간으로 태어나 호기심과 모험심이 출중한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려니 삭신이 안 쑤시고 배길 리가. 아오.


다시 우리는 futureway로 돌아왔다. 짐을 내려놓고 우선 산촌 다람쥐에 인사를 드린 후, 씻었다. 진짜 설설 끓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니 감동이 따로 없다. 벅벅 씻고 옷도 싹 갈아입고 선영이랑 환전을 위해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런데 다 씻은 해맑은 모습으로 선검이와 마주쳤다. 트래킹 내내 머리도 안 감고 세수도 안 하고 같이 다녔으면서, 왜 씻고 나니 더 부끄러운 건지... 더 이상 때로 가려지지 않는 민낯이 송구스러운 걸까. 커커. 돌아다니다 파란 머리띠를 하나 샀다. 내내 머리에 달고 다니던 나의 새싹(앞 글들을 읽어 보시면 나옵니다;;)과도 안녕이다. 고로, 부끄러움과도 안녕이다. 하하.


포카라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업체를 찾았다. 여기저기 알아보다 5,500루피로 굉장히 싸게 예약할 수 있었다. 엄마와 아빠, 선영이는 역시 들뜬 모습이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나는 살면서 새가 되고 싶었던 적도 없다. 그래도 내일모레 11시에는 하늘을 날고 있겠지. 이 다이내믹한 여행의 끝에 내 몰골이 어떨지 두려워하며, 트래킹 내내 우리가 돌아가면 꼭 가자고 입을 모아 부르짖던 식당 '낮술'에 갔다. 삼겹살과 뚝배기 불고기를 시켰다. 아, 두근두근. 그 와중에 나는 휴지를 옮기다 촛불이 붙어 멀쩡한 가게 하나를 몽땅 태울 뻔했다. 엄마한테 맞아 죽을 뻔했다. 그래도 음식이 나오니 우적우적 맛만 있다. 행복한 시간이다. 더구나 와이파이님이 내려주신 인터넷과 카톡 세상 덕분에 한층 더 즐겁지 아니할 수가 없다. 아, 그러니까 난 역시 도시가 좋았어. 허허.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keyword
hearida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에세이스트 프로필
구독자 4,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