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둘. 느릿하게 흘러가는 하루
(2012년 4월 네팔 여행 당시 쓴 일기를 바탕으로 쓴 글과 사진이오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그새 산에서의 하루가 습관이 되어버린 건지 눈을 뜨니 4시 반이다. 누운 채로 아이팟의 음악을 킨다. 엄마는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는 '높고 낮음 없이 흥얼거리는' 음들이 내 마음을 살랑거린다. 그렇게 한참을 노래를 들으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5시 반쯤 선영이가 잠에서 깬다. 하루 24시간을 종일 붙어있는데도 여전히 눈만 마주치면 할 말이 넘쳐난다. 마침 어제저녁에 사놓은 초코 과자가 있어서 뜯어먹는데, 아마 사놓지 않았더라면 둘이 붙잡고 엉엉 울었을 것 같다. 이 초코 과자 굉장히 매력적인걸. 헤헷.
씻고 아침식사할 곳도 찾을 겸 산책을 나선다. 신나게 걷다 보니 어느새 페와호수까지 와버렸다. 누구보다 먼저 새들이 우릴 반긴다. 걸음을 흠칫, 할 만큼 거대한 새무리가 나무 위로 가득 펼쳐진다. 새들은 아직 하루를 시작할 마음이 없는지 미동도 없다. 오로지 분주한 것은 후각을 공격하는 무시무시한 새똥 냄새뿐. 후- 그래도 숨을 꾹 참고 새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걷는다. 그것이 아무래도 이곳에 먼저 터를 잡은 새들에 대한 예우일 터였다.
우리의 걸음 끝자락을 따라 호수가 이어진다. 그리고 그 위로 붉은 아침 해가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세상을 밝히는 고운 해님, 오늘도 세상을 따스히 밝혀주세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호수 주변을 걷는다. 이곳에 온 이후로, 살면서 마주한 적 없었던 여유롭고 평화로운 아침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로 돌아가서도 부디 이 아침을, 이 마음을 잊지 않았으면.
숙소로 돌아오니 엄마의 컨디션이 안 좋다. 원체 여리고 병치레도 잦은 편인데, 아무래도 지역 자체가 위생 면에서 조금 부족할 수 있다 보니 탈이 난 것 같다. 더구나 트래킹을 마치고 나니 긴장이 풀려서 더 아픈지도 모르겠다. 여러모로 걱정이 아닐 수가 없다. 일단 급한 대로 산촌 다람쥐에 가 약을 얻어왔다.
아픈 엄마와 함께 Once upon a time!이라는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베이컨 블랙퍼스트 두 개랑 트랙커 블랙퍼스트, 엄마를 위한 토마토 수프를 시켰다. 영 입맛이 없는지 엄마는 한술 겨우 뜨고는 그릇을 물린다. 우리가 억지로 권하자 마지못해 몇 숟갈 더 입에 가져가고는 다시 고개를 젓는다. 식사를 마친 후, 누워서 쉬고 싶다는 엄마를 부축하여 아빠는 숙소로 돌아가기로 한다. 빨리 나아야 하는데, 걱정이다. 엄마의 작은 몸이 하루 사이에 더 야윈 것 같아 돌아서 가는 뒷모습에 마음이 저린다. 내가 너무 투덜대서 엄마가 아픈 건가 싶어 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엄마, 미안해요...
엄마의 피로도 풀 겸 오후에는 마사지를 받기로 하고 선영이와 둘이서 알아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곳곳에 너무 많은 가게가 있어 결정 장애가 오려는 찰나, 꽤 괜찮아 보이는 곳이 있어 예약을 했다. 숙소에 돌아오니 엄마는 주무시고, 아빠는 동네 산책을 나가신 터라 딱히 할 일이 없던 우리는 근처 카페로 향했다. 그동안 왔다 갔다 하면서 쇼윈도에 진열된 맛있어 보이는 케이크들을 보고 선영이랑 꼭 오자고 찜해둔 곳이었다.
우리는 신나게 캐롯 케이크와 마블 케이크, 카페라떼와 카페모카를 시켰다. 실로 오랜만에 접하는 달콤한 케이크와 따땃한 카페인에 벌써부터 콩닥콩닥 마음이 떨린다. 그리고 짜잔- 짜자잔- 짜ㅈㅏㅈ... 음... 나 살아생전에 케이크를 칼로 써, 써, 썰어먹게 될 줄이야. 엄청나게 딱딱한 케이크를 겨우 썰어 한 입 넣으니,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퍼지... 기는 개뿔! 악관절로 10년 교정해 겨우 맞춘 비싼 턱이 다시 나갈 것 같은 이 식감이란. 그나마 캐롯 케이크는 계속 씹고 또 씹으면 조금 촉촉해지는 것 같기도 한데, 마블 케이크는 그냥 호남평야의 흙 맛이 난다. 으하하! 뭐, 그래도 카페라떼는 카페라떼긴 한데 모카라떼는 카페라떼를 그냥 두 컵 부은 것일 뿐 모카의 향 따위 기대하면 안 되는 거였어. 그래, 그런 거였다고! 먹으면 먹을수록 마시면 마실수록 기똥찬 맛이 이어진다.
하지만 선영이도 나도 그저 웃을 뿐이었다. 지금 이 거리의 이 시간이 너무 여유롭고 평화로와서, 케이크나 커피의 맛을 모두 덮어버릴 듯 달콤했기 때문이다. 쨍쨍 내리쬐는 햇살 아래 알록달록 활기가 넘치는 거리와 웃음 띤 얼굴로 한가로이 거니는 사람들... 그리고 조용한 카페에 앉아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우리. 마치 지금껏 겪어보지 못했던 느릿한 시계의 시간 속을 떠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맛이 어떤들 또 어떠하리.
점심시간이 되어 엄마 아빠를 찾으니, 두 분은 산촌 다람쥐에서 드신다고 우리끼리 점심을 해결하라 하신다. 선영이와 나는 funky salsa라는 이름의 펍으로 들어갔다. 딱히 배가 고픈 건 아니어서 간단히 샐러드를 시켰다. 그런데, 늦어도 너무 늦게 나온다. 우린 둘이서 지금 밭에 새로 씨를 뿌려 풀을 키우고 있는 거다. 아니다, 양계장에서 닭이 알 낳는 걸 기다리고 있는 거다. 말싸움을 해가며 이 기다림의 이유를 멋대로 추측했다. 그리고 약 45분여를 기다려 드디어 샐러드가 나왔다. 뭐, 갓 낳은 알은 아니었지만, 갓 삶은 계란임엔 분명했다. 특이한 건 토마토가 껍질만 들어있었... 아직까지도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맛은 몹시 훌륭했으니, 우린 또 기다리면서 투덜댄 것도 있고 신나게 먹었다. 심지어 믹스드 라씨는 진짜 꿀맛! 이 정도면 기다릴만했다고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식당을 나선 우리였다.
해가 조금 들어간 덕에 산책 겸 거리 구경에 나섰다. 일단 슈퍼에 들어가 초콜릿과 쿠키를 좀 사고 옷가게도 기웃거려 본다. 그런데 가게 앞에 걸린 점프 슈트처럼 생긴 하얀 바지가 내 눈을 확 사로잡는다. 의외로 수줍음이 많은 편이라(!) 옷 쇼핑을 잘 안 하는데, 너무 마음에 들어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들어가 입어봤다. 입으면서 나는 상상했다. 이 옷을 입은 후의 내 모습이 어떨지 말이다. 드디어 착의를 마치고, 천천히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드디어 짠- 거울에 비친 아름다운 내 모습... 이 세상에 있기는 한 걸까? 상상한 것과 너무 달라 부르르 전신이 떨린다. 한마디로 상당히... 별로였다. 음... 정확히 콕 찝어 말하자면, 별로인 건 옷이 아니라 내 몸이었다. 하얀 점프슈트를 입은 내 모습을 어디선가 본 듯하다. 아, 김장 때 할머니가 튼실한 놈으로 고른 조선무가 이런 비주얼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몹쓸 비루한 몸뚱이 같으니! 조심스레 옷을 벗어 고이고이 다시 돌려드리고는 머쓱한 발걸음을 급히 돌려 밖으로 돌진한다. 제길, 제길!!! 트래킹해도 결국 안 빠졌어. 등산해도 안 빠지는 사람은 안 빠지는 거야, 많이 먹으면 다 소용없는 거라고! 으아아!!!
점프 슈트의 충격으로 벌게진 얼굴을 한 채, 마사지 시간이 다 되어 엄마 아빠에게 갔다. 엄마한테 안겨 방금 내가 맛본 굴욕을 전하니, 엄마가 아픈 것도 있고 꺼이꺼이 웃는다. 그래, 나는 엄마에게 큰 웃음을 전하기 위해 그 옷을 입은 거야. 이건 마치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와 같군, 하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아빠가 다니시며 더 괜찮은 마사지샵을 찾으셨다고 하신다. 그래서 오전에 예약한 곳을 취소하고 갔더니 정말 고급스럽고 깨끗하고 좋은 곳이었다. 엄마는 스페셜 오일 마사지, 아빠는 핫스톤 마사지, 나랑 선영이는 그냥 오일 마사지만 하기로 했다. 그런데 나를 해주신 분이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막 거친 숨소리를 내시면서, 내 살을 무참히 뜯고 꼬집고 비트신다. 이미 왼쪽 다리 한 짝을 하신 후 지쳐버리신 것 같다. 옆에서 선영이를 하시는 분도 마찬가지. 우리는 누워서 몸 둘 바를 모르고 죄책감에 휩싸였다. 끝나고 나니 그분들 얼굴은 땀으로 번들번들, 우리 얼굴은 오일로 번들번들. 서로가 서로에게 죄송한 마음이 그지없던 마사지였다. 다행히 마사지를 마친 엄마는 대 만족이었다. 그럼 됐지, 엄마가 만족이면 나는 언제나 대만족! 헤헤.
마사지를 마친 후 엄마랑 아빠가 자신 있게 데려간 소비따네. 남편 분이 한국에서 오래 일을 하셨고, 그 인연으로 한국 음식을 하게 되셨다고 한다. 소비따는 두 분의 예쁜 딸 이름이었다. 엄마의 속을 달래줄 닭죽을 시키고, 우리는 침샘을 자극하는 수많은 메뉴 중 제육덮밥을 시켰다. 결과는 대박! 정말 한국에서 먹은 것과 견주어도 지지 않을 정도로 맛있어서 마시듯이 밥을 먹었다. 세상에, 라씨도 먹어본 중 최고로 맛있어서 폭풍 흡입! 맛과 가격 모두 큰 기쁨 대 만족 왕 감동인 소비따네였다. 다시 외칩니다, 소비따네 만세! 최고 최고 최최최고!!! 진짜 포카라의 보석입니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