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넷. 포카라의 아름다운 밤
(2012년 4월 네팔 여행 당시 쓴 일기를 바탕으로 쓴 글과 사진이오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레몬 트리에서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선영이와 스위스 버스로 향한다. 내일 비행기 예약을 위해서다. 드디어 내가 원한대로 비행기에 몸을 싣는 거... 라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표는 엄마와 아빠를 위한 것이다. 앞서 밝혔듯 포카라에서 카트만두까지의 버스 여행은 어디까지나 선영이와 엄마, 아빠의 바람이었을 뿐, 내 한 몸 편한 것이 제일 좋은 나는 무조건 비행기를 타겠다고 선언했었다. 하지만 세 사람의 간곡한 애원과 협박에 결국 무릎을 꿇고 버스행을 결심했는데, 이제 와서 엄마랑 아빠는 비행기를 타신다고?! 엄마 컨디션이 안 좋아 내린 결정이니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 홀로 삼인조 사기단에게 당한 것만 같은 오묘-한 느낌에 뒷골이 당길 뿐. 흑흑.
내일 16시 25분 비행기를 예약한 후 슈퍼에 가서 물도 사고 하나로 PC방에서 환전도 했다. 그리고 다시 밖을 거닐다 뜨거워진 햇빛을 피해 Maya Pub으로 들어간다. 오가닉 커피와 시나몬 롤을 시키고 선영이와 벌써 아득해지는 트래킹의 추억을 되새겨본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부터 늘 소박하고 소소한 행복이 이어지는 삶에 대해 입버릇처럼 얘기하곤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렇게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쫓기는 일 없이 선영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엄마 아빠와 함께 여행을 하는 것도 모두 다 행복이구나. 지금 나는 더없이 행복하다. 스쳐가는 매 시간에 깊이 감사하고 순간순간을 담뿍 느끼고만 싶다.
12시에 소비따네 가서 어제 킵해둔 창을 꺼낸다. 그렇다. 어버이도 못 알아본다는 그 낮술을, 내가, 지금부터 마시고자 한다. 커커. 안주로는 역시 스쿠티와 꽁치 김치찌개만 한 게 없지. 맛있게 먹는 중에 엄마랑 아빠가 오신다. 마침 옆자리에 우리에게 스쿠티의 매력을 알려준 착한 총각이 있어 엄마 아빠는 그 총각과 이야기를 나누신다. 우리는 우리대로 맞은편에 앉은 아가씨와 수다를 떨다가 버스 예약을 도와달라는 부탁에 선뜻 함께 길을 나선다. 스위스 버스까지 안내한 후 살짝 뿌듯한 마음으로 숙소에 돌아와 책을 핀다. 문 틈 사이로 빛과 바람이 알맞게 들어오는 방 안 침대에 누워 있으니 책이 아니라 기분 좋은 시간을 읽는 기분이다.
4시쯤 산촌 다람쥐에 잠시 다녀왔다 5시 반쯤 선영이와 산책을 시작한다. 오늘은 원래 다니던 길과 다른 방향으로 걸어본다. 별거 없을 것 같던 그 길에 맛있어 보이는 꼬치를 파는 가게가 늘어서 있다. 골목에 들어서 조금 걷자 포카라에서 보기 드문 세련된 외관의 빵집이 눈에 들어온다. 침이 꼴깍 넘어갈 만큼 맛있어 보이는 빵들과 코를 자극하는 달콤한 향에 빨려들듯 가게로 들어선다. 그리고 선영이랑 하나하나 빠짐없이 구경하고 고심 고심한 끝에 초콜릿 무스를 하나 시켰다. 경건한 마음으로 포크를 들어 한입 베어 물자, 오-! 이것은 천상의 맛이다! 부드럽고 달달한 진짜 초콜릿에 촉촉한 빵이 혀에 닿자마자 사라져간다. 눈물이 퐁퐁 솟아날 만큼 감동적이다. 어찌 이 가게를 오늘에서야 찾았는지...
어쩌면 여행에서 길 밖으로 나서는 건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여행 지도를 확장해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인생 역시 지금 서 있는 길 밖으로 벗어나서야 비로소 진짜 보물을 찾게 되는 건 아닌지. 오늘 이 곳, 이 자리에 서 있는 나처럼 말이다.
초콜릿 무스의 감동을 가슴에 새기며 다시 밖으로 나선다. 선영이가 매의 눈으로 발견한 네팔 바지와 머리띠를 사고 엄마 아빠를 만나 참새처럼 오늘의 일을 종알종알 전한다. 넷이서 꼬치 포차에서 꼬치를 먹는 중에 엄마 아빠가 낮에 우연히 알게 됐다는 총각 두 사람이 인사를 한다. 근처에 식사할 곳을 묻길래 소비따네를 소개하여 주었다. 소비따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왠지 낮에 마신 창이 살짝 부족한 듯하여, 우리도 소비따네로 향한다.
길을 걷다 보니 앞서 걷던 총각들과 만나게 되어 함께 소비따네에 도착했다. 이미 가게 안에는 산촌 다람쥐에서 얼굴을 익힌 한 무리의 한국분들이 계신다. 두 총각은 총각들대로 앉고, 우리도 한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간단히 스쿠티에 창을 시키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엄마 아빠가 피곤하시다며 먼저 일어나셨다. 남은 선영이와 나는 자연스레 두 총각과 통성명을 나누고 자리를 합석하였다. 각각 부산과 서울에서 온 총각들은 자신들 역시 오늘이 초면이며, 각자 긴 여행을 거친 후 트래킹을 위해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서로서로 잘 모르는 우리 네 명은 지난 여행과 앞으로의 여행 이야기를 신나게 나누며 창을 세 병이나 비웠다.
10시가 되어 소비따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자, 흥이 오를 대로 오른 우리는 2차를 가기로 결정한다. 두 총각을 따라가니 평소 다니던 길 안쪽 골목 깊숙이 Pub이 제법 보인다. 그중 honey bee라는 이름의 Pub에 들어가니 밖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규모가 굉장히 컸다. 라이브 음악이 크게 울려 퍼지는데 실내는 잘 정돈되어 분위기도 제법 좋았다. 이곳에 온 이후로 늘 9시에 취침하여 4시 반이면 기상하는 새나라의 어른이로 살던 선영이와 나는 한껏 신이 났다. 매일 선영이랑 숙소 앞 아시아나 클럽을 보며 이제 우리도 문란해지자 문란해지자 입이 닳도록 말만 했는데, 포카라의 마지막 밤에 이런 신세계를 발견하다니. 오예-! 물론 뭐, 문란하고는 조금 거리가 멀긴 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마지막 밤을 즐거운 추억으로 장식할 수 있다니.
쉴 새 없이 떠들며 마른 입을 맥주로 축여가며 이야기를 나누다 12시 반이 돼서야 일어선다. 밖으로 나오니 그새 거리의 가게들은 문을 다 닫고 불도 다 꺼진 채였다. 정적이 흐르는 낯선 포카라의 거리에 덜컥 겁이 났다. 선영이와 둘이었다면 분명 꺼이꺼이 울면서 애국가를 목놓아 부르며 미친 여자처럼 숙소까지 뜀박질했을지도 모른다. 이래 봬도 힘이 좋아 어디 새우잡이 배에라도 팔려가면 참 쓸모가 있거든. 흑흑. 하지만 다행히 사람 좋은 두 총각이 함께 있으니 넷이면 뭐라도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든든하다.
밤바람이 머리칼을 스친다. 기지개를 켜듯 고개를 드니 별이 총총 높은 하늘에 가득 떠 있다.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하늘에 닿아 빛을 발하는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어 지는 무수한 별이다. 괜히 뭉클해지는 건 모두 다 같은지, 우리는 그저 말없이 페와호수를 향한다. 페와호수에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만이 가득했지만, 되려 그 어둠이 그간 어지러웠던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그런데 순간, 놀라운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세상에! 책에서만 보던 반딧불이가, 하늘에 별만큼 많은 반딧불이가 눈 앞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이다. 살면서 그렇게 많은 반딧불이를 보는 일은 그 전에도 없었지만, 그 이후로도 아마 없을 것이다.
네팔에 발을 디딘 후로, 비현실적인 풍경들이 매번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나는, 또 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그 모습에 마음을 뺏기고 만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곳은 혼탁한 마음을 앗아가는 대신 맑고 담백한 마음을 되돌려주니, 그저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는 몇 시간째 서로의 성량을 자랑하던 수다쟁이들이라는 걸 까맣게 잊고 시간도 잊은 채 말없이 하늘과 반딧불이만 보고 또 보았다.
반짝이는 빛들을 마음에 담고 발길을 돌려 숙소로 향한다. 총각들이 친절하게 숙소까지 함께 해준다. 아마 멜로드라마라면 이즈음 해서 사랑이 싹텄겠지만, 이건 다큐멘터리인지라 아주 순수하게 여자 생명체들 대 남자 생명체들의 단합대회로 마무리하며 웃으며 안녕을 나누었다. 덕분에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포카라의 아름다운 밤을 만날 수 있었다. 고마운 사람들, 남은 여행도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참, 숙소에 들어서자 엄마가 손전등을 돌리며 기다리고 계셨다는, 뭐 그런... 매섭게 내 등짝을 내려치시는 그 손은 절대 아픈 분이 아니시더라, 쩝.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