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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Dec 10. 2016

안 해도 괜찮지만, 해도 참 좋은 것

결혼인 것 같아요

팔에 멍 투성이에요.

특히 팔 안쪽으로 선처럼 퍼런 멍들이 들어있어요.    

짐 싸느라고요.


저랑 유유, 4월에 결혼하는데요.

4월 1일에 해요.

만우절날 거짓말처럼 결혼하게 됐어요.


시국이 이런 때에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싶지만요.

저희 집안이 좀 샤머니즘적인 부분이 있어서요.

결혼 날짜를 사주와 우주의 음양오행에 따라잡았거든요.


그런데 저는 죽어도 4월에 결혼을 하고 싶었어요.

왜냐면요.

여행은 역시 4월이잖아요. 그쵸?


이런 단순한 이유로 4월에 날을 고르는데, 주말이어야 다들 오시기 좋으니까요.

그래서 1일이 됐어요.

다들 '거짓말이라고 아무도 안 오는 거 아냐?'라는 아재 개그를 마흔다섯 번쯤 들은 것 같네요, 쩝.


유유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어요.

4월에 한다더니 1일로 잡아왔다고, 너가 그러자고 우겼지?

막 이래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요.

연애의 시작부터 프러포즈 등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제가 불도저처럼 밀어붙였잖아요.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일찍 결혼하려고 1일로 잡은 거 아니냐, 이런 합리적인 의심을......


어쨌든 결혼식은 만우절인데요.

신혼집 잔금 치르고 나서 이사하는 날이 이달 24일이에요.

뚜둔~ 크리스마스이브에 함께 살게 됐어요.


뭐, 그런 연유로 짐을 열심히 쌌답니다.

유유 쉬는 주말에는 같이 할 게 너무 많고요.

원래 다음 주에 천천히 하려고 했는데 수술을 하게 됐거든요.


'문장 도둑'에 이미 썼지만 걱정할만한 수술은 아닌데요.

주중에 3, 4일을 입원하고 또 퇴원하면 힘을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요.

그냥 죄다 싸서 제 방에 박스를 테트리스 하듯 차곡차곡 쌓았어요.


제 방이 작거든요.

그런데 그 방에서 막 요술램프처럼 짐이 솟아나더라고요, 무섭게.

이틀을 꼬박 박스를 만들고 넣고 테이프를 붙여서 쌓기 바빴네요.


하긴, 그럴만하기는 해요.

제가 미련하게 책 욕심이 많아서요.

매트리스 아래 책 박스 큰 거 여섯 개를 둬서 침대를 만들었거든요.


이번에 이사한다고 팔고 기부하고 했는데요.

아직 신에게는 550여 권의 책이 남아있......

계속 사고 있......


그래서 혼자 짐 싸면서 계속 중얼거렸어요.

박스를 드는 데 너무 무거운 거예요.

부모님 안 계실 때 혼자 쌌거든요.


X벌, 그 많고 많은 취미 중에 왜 하필 책을 좋아해서 이 사단이냐.
X병, 나는 역도를 했어야 했어, 그럼 이 나라의 빛과 소금이 됐을 거여.


하여튼 구시렁대면서도 어떻게 다 싸긴 했네요.

이렇게 싸고, 이사 가면 다 풀겠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왜 같은 실수를 반복흐느......


이제 2주 후면 같이 산다니, 아직 안 믿겨요.

연애를 꽉 채워 3년을 했지만 함께 생활하는 건 또 다른 거니까.

어떤 일들이 생길지 두근거리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해요.


나의 생활이라는 원과 그의 생활이라는 원이 만나는 거잖아요.

만남을 다른 말로 하면 부딪히는 거고요.

그 부딪힘 속에서 균열이 생기기도 하고 상처가 나기도 하겠죠.


중요한 건 그런 과정들을 현명하게 헤쳐가는 거니까요.

너무 제 욕심부리지 않고, 또 과하게 맞추려 무리하지 않고.

둥글게 둥글게, 할 수 있을까요?


요 몇 달 준비하고 양가 어른들을 뵙고 가족이 될 준비를 하면서 깨달은 건데요.

결혼의 교훈은, 세상이 내 마음대로만은 되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는 게 아닐까 싶어요.

정말 아무것도 저 혼자만의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게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요.

어쨌든 지금까지는 가족이 있어도 대부분 자신의 의사가 중요했잖아요.

내 인생은 내 것이고, 잘되고 못돼도 내 책임이었어요.


그런데 결혼은 내가 이렇게 하겠다 생각을 해도요.

유유 생각이 있고, 양가 어른들 생각도 있고.

다양한 생각이 있는데 뭔가 정답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내 생각에 이게 좋을 것 같고 이렇게 하고 싶고, 그렇죠.

하지만 다른 관점들이 자꾸자꾸 나와요.

거기서 내 말만 옳다고 주장할 수는 없더라고요.


물론 제가 보기에 불합리한 관습처럼 보이는 것도 있지만요.

어른들은 그게 당연하셨으니까, 제 얘기가 황당하실 수도 있어요.

누구만 옳고 누구만 똑똑하고 누구만 합리적이고,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새삼 깨닫고 있어요.


아, 세상에 답이 하나만은 아니구나.
아, 내 인생이지만 다 내뜻대로 되진 않는구나.
하지만 그게 나쁜 것도 아니구나.


다행히도 유유 댁 어른들, 정말 좋은 분들이세요.

유유야 말할 것도 없고요.

저희 부모님은 제게 언제나 완벽한 분들이시고요.


문제는, 저예요.

저만 잘하면 됩니다.

아무래도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쩝.


마음을 그렇게 먹어도 가끔 답답할 때는 있는데요.

이때는 친구 찬스!

강여사가 대나무 숲처럼 속 얘기를 다 들어줘요.


이러니, 어떻게 제 삶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결혼은 꼭 내 생각대로만은 되지 않지만요.

덕분에 생각도 못했던 곳에서 행복이 솟아나는 그런 요술 주머니 같아요.


그래서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고요.

더구나 결혼할 시기나 대상이 정해져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지만요.

한다 해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아니, 아니에요.

결혼은 해도 좋은 것이요.

참 좋은 것.


오늘은 바람이 더 차네요.

찬 바람에 누구도 외롭지 않았으면 해요.

그리고 담뿍, 담뿍 행복하시길.


감사해요, 언제나 언제나요. :)



2016년 12월 5일 겨울을 맞이하고 있어요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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