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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Jan 25. 2017

화장실과 사랑에 빠지다

-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남편 이야기

요즘 퇴근할 때 기대되는 게 두 가지가 있거든, 결혼 전에 혼자 살 때는 몰랐던 거야.


 어제저녁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자몽차를 마시면서 유유가 한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그게 뭐냐고 물었거든요. 그랬더니 하나는 매일 제가 해주는 저녁이라네요.

 사실 제가 요리를 잘하는 편은 '결코' 아닌데요. 요즘 열심히 노력하고 있거든요. 유유는 매일 새벽같이 출근하는데요. 아침에도 제가 일어나서 좀 챙겨주려고 해도 자라고 하고, 자기 혼자서 조용히 시리얼 먹고 나가거든요. 근데 제가 밖에 출퇴근하는 사람도 아니고 집에서 일하니까요. 어쨌든 같이 하는 저녁에는 되도록이면 맛있는 걸 해 먹자고 다짐했어요. 뭐, '아직은' 그렇습니다, 아직은요;; 

 손재주도 별로 없고 미각도 뛰어난 편이 아니고 꾸미는 걸 잘 하지도 않지만요. 매일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뭔가 하나씩은 하려고 하고 있는데요. 고맙게도 유유가 입맛이 까다롭거나, 꼭 한식을 고집하거나 국이 있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요. 다 잘 먹고 맛있다고 해주고, 정말 고맙다고 해줘요. 이것도, '아직'은요;; 그래서 하는 게 어렵기는 해도 보람이 있어요. 어제는 두부랑 돼지고기로 함박스테이크를 했는데요. 그것도 또 싹싹 맛있게 다 먹어주더라고요. 모양이 거지 같았는데;; 아, 오늘은 폭탄이 터지지 않은ㅠㅠ 계란찜과 짜글이였어요.

 

 유유 대답에 기분이 좋아져서 또 하나는 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유유가 라고 물었더니, 또 하나는 바로!

화장실에서 보내는 혼자만의 시간

이라는 거예요. 이 대답에 정말 빵 터진 거 있죠.


 같이 살 집을 구하면서 가장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었거든요. 저는 소음에 굉장히 예민한 편이어서 무조건 제일 꼭대기층 조용한 집이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유유가 하는 말이요. 자기 방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대요. 저희가 작은 방이 하나 더 있기는 한데요. 심지어 거기에 도어록을 달겠다고, 맙소사! 뭐, 그 이야기는 제가 유유 뱃살에 강력한 주먹을 날리고 조용히 마무리가 됐어요.

  

 사실 저야 유유가 없는 시간에 내내 집에 저 혼자다 보니 따로 제 방이나 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쭉 매일 저희 집의 모든 시공간을 지배하는 자로 살고 있거든요. 청소나 빨래나 요리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며 보내요.

 하지만 유유는 그렇지가 않죠. 제가 아무리 간섭하지 않고 잔소리를 안 하려고 해도 그게 되나요. 왜 그런 이야기 있잖아요. 여자 친구가 있으니 좋긴 한데, 재밌게 놀고 나서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집에 안 간다고. 딱 그런 거죠. 같이 있을 때 안방이나 작은 방에 유유가 들어가서 혹 문이라도 닫으면, 기본적으로 노크는 하는데요. 바로 이어서 문을 열고 '뭐해요?'라고 하거든요. 안 보이면 보고 싶고 궁금하고 그렇잖아요.


 뭐, 그래서 겨우 찾은 방법이 화장실인 것 같더라고요. 아니, 정말 샤워하는 시간은 별로 오래 안 걸리는데요. 화장실에 엄청 오래 있는 거예요. 처음에는 변비인가 싶더라고요. 제가 오죽하면 '같이 병원에 가자. 그러다가 치질 걸린다. 유유, 혹시 배변 활동에 큰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라고 했다니까요. 정말 걱정돼서 하는 소린데 그런 거 아니라고 고개를 절레절레하더라고요.

 그렇게 매일 지내다 보니까요. 유유가 화장실 간 후에 가만히 소리가 들리는데, 그냥 볼 일을 보는 게 아니더라고요. 화장실에 앉아서 뭐, 인터넷 검색도 하고 핸드폰 게임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딱히 제가 하지 말라고 하는 건 아닌데요. 그래도 너무 오래 보면 눈도 피로하고 하니까 한 소리를 아무래도 하게 될 때가 있어요.

 

 저희 부부가 굉장히 짓궂은 장난도 많이 치거든요. 레슬링 같은 것도 진짜 진지하게 해서요. 재작년에는 제 흰자가 터지기도 하고, 며칠 전에는 입술 안을 손가락으로 찔려서 피가 나기도 하고 그래요. 그런데 화장실은 일종의 성역인 거예요. 아무리 장난치기 좋아하는 저희 부부라도 여기만은 터치하지 않거든요. 화장실에 들어가면 '왜 안 나오냐, 뭐 하냐' 나올 때까지는 묻지도 않고요. 당연히 문을 함부로 열거나 그러지도 않아요.

 그래서 우리 귀여운 유유 군, 화장실에서 오롯이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있는데요. 어제는 정말 한 시간이 넘게 안 나오대요. 결국 유유가 나오자마자 제가 '여보, 자꾸 그러면 화장실 문을 유리문으로 바꿔버릴 겁니다!'라고 선언했어요. 그랬더니 그럼 정말 작은 방에 도어록을 달겠다고 반발하는 유유 군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진지하게 유유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또 항문 건강을 위해서! 혼자만의 시간을 더 편하게, 더 많이 줄 필요가 있겠구나 싶어요. 누구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거니까요. 아무리 계속 붙어 있고 싶고 아무리 함께 얘기하고 싶어도, 그럴수록 더 조심해야겠다 생각했어요. 상대만의 공간과 시간을 존중해줌으로써, 앞으로 함께 할 수많은 공간과 시간에 행복이 더 싹트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상, 화장실과 사랑에 빠진 유유와, 닫힌 화장실 문을 보며 큰 교훈을 얻은 헤아의 오늘 이야기였습니다. :)  




2017년 1월 25일 저녁 식사 후 살포시 잠이 든 유유 군 도촬 실패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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