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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Jun 29. 2017

초록의 날들

식구가 늘었다?!

 매주 수요일은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 장터가 서요. 햇빛을 가득 머금어 싱그런 색으로 알록달록한 싱싱한 야채와, 금방이라도 펄떡 튀어 오를 듯 신선한 생선과 해산물. 거기에 뻥튀기며 닭강정, 족발과 떡볶이, 순대에 튀김까지 보기만 해도 배부른 먹거리로 가득합니다.

 바로 옆이 마트라 언제든 시원한 에어컨 바람맞으며 장을 볼 수 있지만, 이상하게 장이 서는 날을 기다리게 돼요. 왠지 더 건강하고 맛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믿음이랄까요. 신기하게 게으른 제 걸음이 수요일만 되면 장터로 향하게 되네요.

 

 어제도 혼자 점심을 해 먹기 귀찮아 떡볶이도 사고 (말로만!!) 다이어터인 유유를 위해 토마토를 좀 사러 장터로 나갔어요. 지갑하고 핸드폰만 손에 달랑 들고, 날이 너무 더워서 대충 면 원피스에 슬리퍼를 직직- 끌며 나갔거든요. 그런데 걷다가 뭔가 허전해서 생각해보니 장바구니를 안 든 거 있죠? 아휴- 주부의 명품 장바구니를 잊다니!! 다시 돌아갈까 하다가 귀찮아서 그냥 직진했어요. 뭐, 많이 살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근데 막상 장터에 가니 튼실한 무에 단단한 애호박에 통통한 가지, 길쭉길쭉 건장한 콩나물까지 사고 싶은 게 한가득인 거예요. 거기다 과일들은 또 얼마나 새콤달콤해 보이던지요. 빠알갛게 익은 새콤한 자두랑 한입 깨물면 육즙이 톡 터질 것 같은 블루베리. 그리고 손으로 치면 퉁퉁- 기분 좋은 북소리를 내는, 제가 너무도 사랑하고 사랑하는 수박까지. 좀 살까 망설이다가 결국 냉장고를 떠올리고 꾹 참고 말았어요.

 실은 얼마 전 회식을 마치고 얼큰히 취한 유유가 길에서 참외를 한 봉지 샀는데요. 그 봉지가 종량제 봉투 10L짜리만 한 거였답니다. 거기다 마음 좋은 아저씨께서 떨이라며, 팔지는 못하지만 달디 단 귤만 한 크기의 귀여운 참외들을 또 그 봉지에 하나 가득 그냥 주셨대요. 그래서 요즘은 아침 점심 저녁, 쉼 없이 참외를 먹고 또 먹고 있어요.

 

 한참을 고민하다 방울토마토와 콩나물, 청양고추, 파프리카, 깐 마늘, 그리고 떡볶이를 사고 아쉬운 마음에 장터 구석구석을 둘러보다 집으로 향했어요. 그런데 돌아오는 길 모퉁이에서 제 눈을 끄는 것이 있었으니, 맙소사!! 지난주까지는 보이지 않던 각종 꽃과 화분들이 길에 가득하지 않겠어요.

 결국 팔목에 주렁주렁 봉지를 끼우고 양 손에 하나씩 화분을 들었네요. 오른손에는 초록초록 잎들이 가득한 향기로운 율마, 왼손에는 사계절 꽃이 피는 사계 국화가 곱게 들려 저희 집으로 이사를 왔지요. 오자마자 흠뻑 물을 주고 닦아준 후 베란다에 제 방을 만들어 줬어요. 이미 둥지를 튼 바질과 천사의 눈물도 잎을 흔들어 새 친구들에게 인사를 해주었습니다.


율마-사계국화-바질-천사의눈물


 연애하는 3년 동안 매주 왔지만,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여전히 제게 낯선 도시예요. 친정도 친구들도 모두 서울에 있고요. 거리도 가게도 추억도, 익숙한 많은 것들 역시 아직 서울에 더 많이 있네요. 회사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 탓에, 장을 보거나 친정 나들이를 하거나 특별한 약속이 있지 않는 한 일주일 내내 집에만 있는 집순이예요.

 혼자서도 워낙 잘 노는 데다 퇴근 시간이면 로켓 발사하듯 집으로 달려오는 유유 덕에 딱히 심심하지는 않은데요. 그래도 집에 조금 더 생명의 온기가 가득했으면 싶을 때가 있어요. 물론 강아지도 고양이도 동물들도 다 좋아하는데요. 겁이 나기도 해요. 예쁘다고 덥석 기르기엔 제가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아서 잘 돌봐주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되고요.

 그러던 찰나에 우연히 버스 터미널에 있는 꽃가게에 들렀다가, 충동적으로 천사의 눈물이라는 화분을 집으로 데려왔어요. 예뻐서 무작정 샀는데, 찾아보니 기르기 까다롭다고 해서 더 정성을 들였죠. 그리고 그 얘길 강여사에게 했더니 어느 날 집으로 놀러 온 강여사가 향도 좋고 요리할 때 넣어서 먹기도 좋다며 바질을 선물했고요. 처음엔 바질 페스토든 바질 파스타든 뭐라도 할 기세였는데, 지금은 자라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먹기는커녕 매일 바라만 보네요.


 어려서는 제가 식물을 기르리라고 상상도 못했어요. 관찰일기 아세요? 요즘 초등학생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국민학교 출신인 저는... 에헴...ㅠㅠ 강낭콩을 심어서 자라는 모습을 관찰해 그림일기를 쓰는 숙제가 있었어요. 근데 다른 친구들처럼 똑같이 물 주고 햇빛을 쬐어도 제 건 늘 앙상하게 키만 크거나 중간에 죽거나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 나는 이런 데 소질이 없구나 싶었죠. 동물은 배고프면 울거나 소리라도 내는데, 식물은 그렇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더 자신이 없었어요. 공부하고 회사 다니다 보면 사실 저 하나도 건사하기 힘들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아침에 눈뜨면 유유보다 먼저 이 아이들에게 가요. 밤새 잘 있었는지 살펴보고, 물도 주고, 어루만지고요. 또 예쁘다고, 고맙다고, 좋은 아침이라고 말도 많이 하고요.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마음으로는 이미 많은 인사를 받은 것 같아요. 따스함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정말 신기한 경험이에요.

 8월엔 식구들과 휴가를 가는데, 진짜 웃긴 건요. 벌써 이 녀석들 밥이 걱정이라는 거예요. 나 없는 사이에 햇빛이 너무 강해 타면 어쩌나, 목이 마르면 어쩌나, 탈이라도 나면 어쩌나 싶어서요. 이러다 데리고 가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레옹처럼 옆구리에 끼고 말이죠.


 식물을 좋아하면 나이가 드는 거라는데, 어쩌면 정말 나이가 드는지도 모르겠어요. 사람들과 만나는 것보다 이 친구들과 서로 마주하는 시간이 훨씬 길어졌거든요. 그게 이상하게 마음이 참 편해요.

 누군가 젊음은 아름답고 늙어가는 건 슬픈 것이라 말했어요. 삼십 대를 반 이상 지난 저도 하루하루 조금씩 젊음의 테두리에서 벗어나고 있겠죠. 하지만 나이가 든다는 게 제게는 그리 슬픈 것만은 아니에요. 매일 제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과 저를 편하게 하는 것들을 새롭게 찾아내는 보물 놀이 같거든요. 그래서 이런 날들이라면 더 나이가 들고 어느 날 꼬부랑 할머니가 된다 해도 저는 아주 슬프지만은 않을 것 같아요.


유유와 저, 그리고 네 친구들이 함께하는 집이에요


 아, 참! 조로록 화분 네 개를 세워놓으니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워 사진을 찰칵찰칵 찍고는, '식구가 늘었다'며 절친 강여사에게 메시지를 보냈어요. 강여사가 선물해준 바질 안부도 전할 겸 밑으로 조잘조잘 가득 글을 썼지요. 그런데 곧 되돌아온 답장엔

나 깜짝 놀랐잖어!!


라고 쓰여 있는 거예요. 알고 보니 일하던 강여사가 메시지 창에 뜬 첫 줄만 읽은 거죠. '식구가 늘었다'?!!! 그럼, 유유 주니어?? 세상에, 이런 사고의 연산 과정을 거쳐 제가 임신했다고 잠시 오해했다네요. 역시 제 친구예요, 강여사. 푸핫! 그래서 저도 총알같이 답장을 보냈어요.


아니,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이 배는 똥배야, 똥배라 미안해, 내가 미안해. ㅠㅠ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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