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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Sep 22. 2017

그런데 말입니다

숨지고 싶냐?

추석 연휴 내내 일을 해야 하는 유유는, 대신 오늘부터 월요일까지 쉬어요.

그래서 어제는 삼겹살에 김치를 둘러 폭폭 끓이고, 뜨끈한 냄비밥도 지었지요.

퇴근하면 같이 저녁 맛나게 먹고요.

둘이 푹 쉬면서 늦게까지 놀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따르릉)

유유: 자기야~

헤아: 끝났어요??

유유: 응, 근데, 있지, 그게, 어, 뭐랄까...

헤아: 안돼. 거기서 멈춰.

유유: 여보, 미안. 빠질 수가 없어서...

헤아: 그만. 난 못 들은 걸로 할게. 어서 오렴.

유유: 여보님, 사랑해요.

헤아: 숨지고 싶냐?


그렇게 유유는 회식을 가버렸어요.

근데 사실 유유가 평소에는 퇴근하면 바로 집에 오거든요.

술을 좋아하거나 늦게 다니는 것도 전혀 아니라서요.

자주 없는 회식 때만이라도 너그러운 아내가 되어야지, 마음먹고 있어요.

그래서 저 혼자 맥주 한 캔을 따서 저녁 식사를 맛있게 폭풍 흡입했지요.

그리고는 기다리는 동안 깨끗이 씻고 팩을 얼굴에 딱 붙이고요.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소파에 누웠어요.

자, 이제부터 다리를 꼬고 한쪽 발꼬락을 까딱까딱거리며 TV를 보려고 했던 찰나...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따르릉)

유유: 여보옹~

헤아: 안돼.

유유: 초미녀니임~

헤아: 얼마나 늦길래 그러는 거여?

유유: 그게 아니고 있지.

헤아: 응

유유: 우리 지금 갈게.

헤아: ???


???

갑자기 세상이 깜깜해지고 배경음악이 깔리는데...

뚬뚬 뚜루룸 뚬뚬 뚜루루~♪ 따라라~ 따라라라 따라라~♬


유유: 여보~ 듣고 있어요?

헤아: 간다는 건 어딜? 여길? 홈? 마이 홈??

유유: 예쓰예쓰!!!

헤아: 내가 갈게가 아니고 우리? 우리가 누군데?

유유: 차장님 하고 동료들하고... 여보의 유~유~!!

헤아: 당신에게는 이제 여보가 없어.

유유: 아잉, 그르지 마요오.

헤아: 됐고, 지금? 지금이면 얼마나?

유유: 20분도 안 걸려요. 여보 사랑해요.

헤아: 여보, 나 지금 씻고 팩 붙이고 누워있는데?

유유: 여보는 뭘 해도 이뻐. (옆에 웅성대며 '감사합니다. 금방 봬요!')

헤아: 숨지고 싶냐?


여하튼!!

20분 동안 옷 갈아입고 BB 바르고 틴트 바르고 급하게 상 세팅도 했어요.

움직일 때마다 막 쉭-쉭- 소리가 났는데요.

이건 시방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녀요.

다행히 삼겹살 김치찜이 있어서 그거 데우고 과일 깎고요.

아, 치킨도 한 마리 시켰네요.

술은 뭐, 언제나 집에 가득하니까요. 캬하-


정말 귀신같이 20분 후에 오셨어요.

그런데 글쎄 미안하다고 제 옷을 사 오셨지 뭐예요.

남자분들이 술 얼큰하게 걸치고는요.

옷가게에 우르르 몰려가 엄청 열심히 고르셨다고 해요.

제 취향을 반영할 수 있게 유유가 이것저것 많이 얘기해줬다고 하네요.

그리고 알았어요.

아, 우리 유유는 내 취향을 1도 모르는구나, 임뫄. ㅠㅠ

마음은 정말 감사히 받는 걸로...

그리고 디자인은 내 마음의 별로... 아무리 봐도 별로...


음, 급작스런 방문에 당황하긴 했지만 사실 전 좋아요.

유유가 하루에 대부분을 보내는 곳이 직장이잖아요.

평일엔 저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동료들인데요.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지는 않으니까요.

이렇게 가끔 얼굴 보고 이야기 나누고 그러면서 유유의 새로운 면도 알게 되고요.

그럴 수 있는 것도 복이라고 생각해요.

다행히 다들 좋은 분들이고요.

누구와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지 알 수 있잖아요.

.

.

.

.

.

.

.

그렇게 며칠 전 전체 회식 끝나고 PC방 갔던 것도 알 수 있고요.

괜찮아요.

유유는 오늘로 생이 끝나거든요.

여기에 쓰는 글도 오늘이 마지막일 거예요.

그치? 유유? 진짜 숨지고 싶은 거잖아, 맞지?

즈는측 흐즈므르... 유유느므...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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