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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Mar 20. 2018

선이 원이 되는 날들

헤아와 유유와 몽실이와, 그리고 튼튼이

 한집 생활을 시작한 지 1년 3개월 차, 결혼식을 올린지도 열하루 후면 꼭 1년이 됩니다. 부부라는 선 위에서 아내라는 한 점이 되어 보낸 열다섯 번의 한 달 중에서 임테기를 사용한 건 대략 여덟 번 정도 되는 것 같아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끔은 장난처럼 또 때로는 기도처럼 확인을 하는 동안 늘 어김없이 그려진 건 단 한 줄의 선이었어요. 어떤 날은 그게 당연한 것 같다가, 또 어떤 날은 야속하기도 하고, 그러나 영영 한 줄만 보게 되는 것은 아닌가 두렵기도 했지요. 그래도 그냥 그 모든 것이 언젠가 자연스럽게 삶으로 나타나겠지, 하는 편한 생각으로 넘기곤 했어요. 물론 저보다 훨씬 느긋하고(또한 몹시 젊은!) 유유는 조급할 것 없다며 빙긋 웃어보였고요.


 그러다 지난달 초에, 몸도 유독 안 좋아지고 마음속 날씨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맑고 흐림을 반복하더라고요. 결혼하며 아기 생각에 중단했던 우울증 약을 다시 먹어야 하나 고민하며 병원을 찾았고, 다시 복용을 시작하기로 한 첫날이었어요. 매달 찾아오는 그 날이 일주일이나 늦어졌지만 스트레스가 워낙 심해서 그러려니 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임테기를 꺼냈어요. 화장실에 갔다가는 그대로 두고 나와서 한동안 TV를 봤지요. 프로그램 하나가 다 끝난 후에 아차, 하며 집어 든 임테기에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보는 선명한 두 줄이 그려져 있었어요. 얼떨떨한 채로 믿기지도 않아 다시 테스트를 하고 또다시 보이는 두 줄에 그제야 진짜? 하는 실감이 든 지도 이제 한 달 반이 지났네요. 저는 10주 하고도 4일 차의 산모가 되었습니다.


 아이가 생기면 동네방네 신나게 알릴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이야기하기 어렵더라고요. 병원에 다녀오면, 심장 소리를 듣고 나면, 안정기에 접어들면, 하며 왠지 말하기를 미루고 미루다 이제 조금씩 세상에 그 존재를 알리고 있어요. 그동안 배에 꽁꽁 숨겨두었던 작은 생명은, 몸도 마음도 그저 튼튼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튼튼이라는 태명을 얻었습니다.


 튼튼이는 이름처럼 튼튼하게 자라기 위해 제 몸의 가장 중심에 자신의 자리를 잡고 조금씩 그 공간을 넓혀가고 있어요. 덕분에 저는 구정 전부터 지금껏 대부분의 시간을 가만히 누워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몸의 기묘한 변화에 적응하고 있답니다.

 차라리 다리가 부러졌으면 다들 내 마음을 알 것 같은데, 딱 집어 어디가 아프다고 말할 수 없이 온몸이 불편해요. 스물다섯 생일에 호기롭게 들이켠 생일주의 악몽 같은, 서른한 살 크리스마스에 친구와 마시고 죽자며 넘긴 소주 다섯 병의 저주 같은 숙취와 비슷한 느낌의 구토감이 늘 턱 밑 침샘에서 맴돌고요. 하루 종일 먹을 것만 생각하는데 정작 먹으면 화장실로 달려가 다 게워내는 일을 반복하고 있어요. 책도 못 읽고 글도 못 쓰고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눈만 멀뚱멀뚱 뜬 채로 하루를 보내자니 바보가 된 것 같은 느낌에 속상하기도 해요.

 그래도 얼마 전부터는 다행히 좀 나아져서 조금씩 제 리듬을 찾아가고 있어요. 아직 지독한 숙취의 느낌은 여전히 턱 아래서 맴돌지만, 입덧 약도 먹고 산책도 하고 되도록 씩씩하게 지내보려 노력 중이에요.


 사실 입덧을 처음 시작할 때는 이렇게 열 달을 보내야 하면 나는 어쩌나 싶고, 유유 배가 더 크니까 유유 배에 튼튼이를 넣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둘째는 내 인생에 없다는 단호한 결심도 했죠.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지만요ㅎ) 하지만 지난주에 병원에 가서 본 튼튼이는 이제 목이 생겨서 얼굴과 몸이 구분이 되더라고요. 그 작디작은 몸 안에 더 작디작은 심장이 쿵쿵 열심히 뛰는 게 보일 때는 진짜 신기했어요. 거기다 팔다리도 생겨서 마치 네 발 달린 땅콩 같은 거 있죠. 보통 그 시기 아가들이 얌전하다는데 초음파 보는 내내 춤추듯 계속 팔다리를 꼬물딱 거려서 의사 선생님과 유유와 한참을 웃었네요.



 사실 저요, 연애 때부터 언젠가 임신을 하게 되면 제 두 손으로 밥도 안 먹고 두 발로 걷지도 않고 아무것도 안 할 거라고 농담처럼 말했거든요. 그럴 때면 유유는 시선을 피하며 저한테 그러지 말라고 하다가, 또 그런 심보라면 아가도 안 온다며 볼을 막 꼬집어대곤 했는데요. 말이 씨가 된다고 진짜 지금 그러고 있어요. 벌써 한 달 넘게 못 먹고 울고 먹고 토하며 ‘임신은 아름다운 거라는 말은 인류 번식을 위해 민심을 교란하는 순 개뻥’이라며 매일 밤 유유를 발로 막 뻥뻥 차고 있어요.

 하지만 사실 착하고 든든한 유유와 부부라는 선의 양 점을 쥐고 있어서, 그리고 그 선으로 튼튼이를(또 몽실이를!) 안는 따스한 원을 그릴 수 있어서 다행이고 고맙다는 생각을 해요.


 드라마나 책에서 본 것처럼 임신이란 게 '어느 날 아이가 생겼고 그로부터 열 달 후 아이가 태어났다'는 말로 요약되는 간단한 일은 결코 아니지만, 사실 전혀 녹록지 않은 과정이지만요. 그래도 튼튼이를 품는 매일은 분명 가치 있고 감사한 날들이겠지요.


 그저 우리 모두 몸도 마음도 튼튼하기를, 봄날처럼 따스한 매일이기를. :)
 
- 헤아, 유유, 몽실이, 그리고 튼튼이 올림

헤아랑 유유랑 튼튼이
그리고 언제나 사랑스런 몽실이까지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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