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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Oct 22. 2023

좋았던 기억 위로 더 좋은 지금을

스플리트 그리고 오미스

전날 무려 새벽 2시에 잠들었어요. 피로도 익숙해져 가는 가봐요. 남편은 방이 넉넉한 덕에 여행 와서 거의 매일 독방을 쓰거든요.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는데 얼굴이 너무 행복해 보여요. 피부에서도 광이 나는 것 같고. 저랑 민이랑 함께 자는 게 그간 많이 힘들었나 봐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고 밖으로 나갔어요. 저희가 머무는 카스텔 노비는 관광지가 아니어서 그런지 마을 사람들이 다들 신기하게 보네요. 아무래도 타지 사람들, 그중에서도 동양인이 자주 나타나는 마을은 아닌가 봅니다.

생각해 보니 십 년 전 엄마아빠와 제가 크로아티아 일주를 할 때는 어디에도 동양 사람들이 드물었어요. 우리나라에서 크로아티아가 많이 알려진 건 ‘더 로맨틱’이라는 리얼 연애 프로그램이 촬영을 하고, 그다음에 ‘꽃보다 누나’를 하면서 많이 알려졌지요. 그전에는 여행책도 거의 없었고 정보도 많지 않았거든요. 

당시에 엄마아빠랑 저는 그냥 선구자 같은 몇 명의 블로그와 두어 권의 책만 의지해 크로아티아에 와서 무작정 네비도 없이 해안도로를 달려 여행했어요. 그러다 마음에 드는 숙소를 발견하면 문을 두드리고 손짓발짓으로 흥정해서 머물고 그랬지요. 

그런 때이다 보니 식당에 가거나 작은 마을을 걸으면, 사람들이 뚫어지게 쳐다봤어요. 어린아이들은 식당에서 아예 몸을 뒤로 돌려서 저희 먹는 걸 바라봤지요. 하지만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웃음이 나는 건, 사람들에게 악의가 전혀 없고 순수한 호기심과 호의가 언제나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그때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네요. 특히 아침에 등교하던 학생들은 일부러 다가와서 인사도 하더라고요. 예전에 이탈리아 신혼여행 때 유람선을 탔는데 초등학생 남자애가 남편에게 “바나나”라고 말해서 어이없어 웃었던 기억이 있는데요. 이번 학생들은 순수하게 “헬로” 하고 인사해 줘서 다행이었어요. 위아더월드니까,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고요.


스플리트에 도착했어요. 스플리트는 아드리아해 최대 항구도시이자, 크로아티아 제2의 도시입니다. 구시가지는 과거 로마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 후 만년을 보내기 위해 건설한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이 그대로 남아 있고, 거리 전체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어요. 구시가지 주위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요. 동서남북 각각의 입구를 은문, 금문, 청동문, 철문으로 부른대요. 거리는 1700년 전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마치 중세로 타임슬립한 착각에 빠지게 돼요.

근데 사실 전 스플리트 기억이 별로 안 좋았어요. 예전에 왔을 때는 폭우 끝에 가서 그런지 어두운 이미지가 강했고, 당시에는 수산시장이 길에 있어서 비린내도 많이 나고 길이 지저분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이미지가 전혀 달랐어요. 아주 매력적이고 즐거움 가득한 활기 넘치는 도시더라고요. 역시 여행에서 날씨는 그 도시의 이미지를 좌우할 정도로 강력한 것 같아요.



궁전도 구경하고 시장도 구경하고 기념품도 사고요. 지칠 때는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도 구경하는데 그것만으로도 재밌더라고요. 다들 표정에서 신남이 가득 묻어나 보는 저까지 흥이 올랐어요. 

참, 며칠 째 수학여행하는 친구들과 마주치고 있어요. 로비니에서도 리예카에서도 여기에서도요. 수학여행 시즌인가 봐요. 매번 다른 학교인 것 같은데 애들 노는 건 어디나 비슷하더라고요. 보고 있으면 학창 시절 생각도 나고 귀여워서 눈을 뗄 수가 없네요. 예전에 스페인 일주할 때 “세마나 산타(Semana Santa)” 축제와 일정이 겹쳐서 나중에는 축제에 축, 자만 나와도 힘들었던 기억이 있는데요. 이번엔  그저 귀엽고 반갑네요.



점심을 뭘 먹을까 고민하다 맛집이라며 찾아간 곳이 식당이라기보다 약간 바 같은 곳이어서 당황했어요. 아이까지 데리고 들어가도 되는지 걱정했는데, 엄청 시크하고 힙하게 생긴 젊은이들(네, 저는 이제 젊지 않아요)이 반겨줬답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옆에 앉은 아저씨들이 가족사진을 찍어준다고 먼저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덕분에 다 같이 사진을 남길 수 있었어요. 친절한 아저씨들 덕분에 기분이 좋았는데, 음식이 나오니 더 기분이 좋아졌어요. 음식 하나하나 플레이팅도 귀엽고 맛있고 분위기도 좋고요. 무엇보다 칵테일이 끝내줬어요.

저, 거기 일하는 언니한테(멋있으면 다 언니니까요) 반해버렸지 뭐예요. 스타일도 좋고 다정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냥 멋져요. 너무 좋아서 술도 취한 김에 팁을 거하게 내고 왔습니다. 예전엔 멋진 남자들에게 눈이 갔는데 나이가 들수록 멋진 여자에 치이네요. 십 년만 젊었어도 따라 해 보고 싶은 스타일이었어요. 젊음이 참 좋네요. 솔직히 저의 젊음은 찌질의 역사였지만, 그래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요. 나중에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는 귀엽고 시크한 할머니로 늙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어요. 그건 한 번 해보겠습니다, 제가!



크로아티아 하면 연관 검색어로 나오는 게 왕좌의 게임 아니겠어요. 왕좌의 게임을 여러 번 정주행 한 남편과, 곁눈으로 함께 본 저도 여기까지 왔으니 뭐라도 하나 사자며 기념품샵에 갔는데요. 사지는 못하고 한참 웃다가 나왔어요. 

정말 다양한 기념품이 있는데, 벨트며 티셔츠며 모자며 키링이며 모든 제품에 그냥 왕좌의 게임 사진을 붙인 것도 일단 너무 재밌었고요. 특히나, 그 저희의 마음을 끈 컵이 있었거든요. 흰 바탕에 심플한 디자인 그리고 ‘Winter is Comimg’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는데, 너무 튀지 않으면서 핵심 대사가 들어있어서 마음에 딱 들더라고요. 가격이 무려 45유로였지만 왕좌의 게임 이름값이라 생각하고 사려고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컵 안을 들여다보고 비명을 지르는 거예요. 글쎄, 컵 안에 늑대가 떡하니 고개를 쳐들고 있는 거예요. 웃긴 것도 웃긴데 설거지가 너무 어려울 것 같아 참았답니다. 아직 기념품 가게는 남아있으니 다음 기회를 노리려고요. 어쨌든 실컷 웃었으니 만족합니다.

슬슬 스플리트를 출발하려는데 남편이 또 한 번 비명을 지르네요. 글쎄, 주차비가 14유로. 다른 도시에 비해 너무 비싸더라고요. 역시 관광지는 달라요. 어디든 사람이 모이는 곳은 돈이 드네요.


자, 이제 엄마가 꼭 보고 싶다던 오미스를 향해 달려갑니다. 그런데 도중에 한적한 바닷가가 눈에 들어왔어요. 민이가 그토록 기대하던 바다수영을 할 수 있는 곳이었어요. 차를 길가에 세우고 급히 차에서 수영복을 갈아입었지요. 그리고 드디어 민이가 바라고 바라던 바다수영을 시작했어요.

사실 저는 이렇게 바닷물에 들어가고 이러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어렸을 때도 물가에 데려가면, 그냥 서서 보기만 하고 발끝도 안 담그는 아이였다고 해요. 하지만 어미가 무언지, 자식이 무언지. 민이가 좋아하니 일단 들어가게 되네요.

근데 신나게 놀던 민이가 발장구를 치다 튜브가 뒤집혀서 그만 물에 빠지고 말았어요. 세상에, 평소에 잘 안 우는 애가 오열을 오열을. 어찌나 울던지요.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엄마가 잡아줬어야지 하면서 째려봐요. 밥 먹다가도 씻다가도 뜬금없이 따지고 삐진다니까요. 그때는 다시 신나게 물놀이했으면서, 기억에는 빠진 것만 남았나 봐요. 이럴 줄 알았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온몸을 던져 막았을 텐데. 아이가 쌍심지를 켜고 따질 때마다 저도 과거의 제가 원망스럽답니다.

  

물놀이를 마치고 젖은 몸을 이끌고 오미스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감탄이 나왔어요.

오미스는 센티나강 하구에 위치한 휴양지인데, 한눈에 보기에도 굉장히 특색 있는 마을이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예전에는 ‘해적의 마을’이라 불렸다는데요. 베네치아 지배에 저항하던 사람들이 먼바다를 지나는 베네치아 배에서 금품을 빼앗아 이 센티나 강을 거슬러 올라 험준한 산에 몸을 숨겼대요. 현재는 바위산의 절벽을 이용하여 암벽 등반이나 계곡 래프팅 등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는 휴양지로 인기가 있답니요.

지금까지의 크로아티아의 풍경과 달리 회색의 바위산으로 가려진 이 신비한 도시를 둘러볼 생각에 저희도 다들 신나 있었어요. 그런데 남편과 제가 우연히 건너편 노천 식당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그들에게 갓 서빙된 햄버거를 봤지 뭐예요. 그 모양과 윤기와 크기와 여하튼 압도적 비주얼에 한눈에 반해서,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식당에 앉아있더라고요. 

점심 식사를 했는데도 진심으로 너무 맛있었어요. 감자튀김 킬러인 민이도 맛있다고 그 큰 감자튀김 한 접시를 다 해치웠답니다. 배가 고팠다면 아마 두 개도 먹었을 거예요. 재밌는 게, 저희 먹는 걸 보고 또 다른 사람들이 홀린 듯 앉더라고요. 손님이 그대로 광고가 되는 신기한 가게였어요.



다 먹고 산책을 하며 남편과 손을 잡는데 민이가 자꾸 훼방을 놓네요. 어디서 들었는데, 동생을 낳을까 봐 본능적으로 엄마아빠 사이를 막는 거라는데요. 아가, 엄마는 이미 너를 낳을 때 노산이었단다. 동생을 낳기는 힘든 나이라고.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일단 엄마랑 아빠랑 자기 빼고 붙어 있는 건 싫대요. 꼭 가운데에서 자기가 양손을 잡아야 한다니까요. 귀여운 아가, 저의 영원한 우주랍니다. 

오미스를 천천히 둘러보고 카페에서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오후 늦게 도시를 빠져나왔어요. 운전 싫어하는 남편이 유럽까지 와서 이렇게 오래 운전하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요. 운전이 싫어서 애 낳고 마흔 다 된 저를 억지로 운전면허까지 따게 한 사람인데 말이에요. 그래도, 또 언제 여기서 이렇게 달려보겠어요. 그렇게 세뇌시켜 봅니다.



도중에 산길을 구불구불 지나다 말리 라트를 지났어요. 십 년 전에 스플리트 가는 길에 폭우 속에 우연히 얻은 숙소였는데요. 집 앞 도로를 건너면 한적한 바닷가와 모래사장이 길게 펼쳐져 있어서 하루종일 수영을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숙소에서는 마당에 가득 열린 무화과를 실컷 따먹고, 발코니에 앉아 글을 쓰고 책을 읽었지요. 

너무 좋아서 눈 뜨면 새로운 곳으로 간다고 약속했던 저희가 하루를 더 연장해 머물렀어요. 주인과 친해진 아빠는 차를 타고 주인의 포도밭도 다녀온 곳입니다. 평생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여기가 천국이겠다 싶었는데. 다들 안녕하신지요.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집에 와서 식사하고 후식으로 낮에 시장에서 산 납작 복숭아를 먹는데 민이가 혼자 거의 흡입하다시피 먹어버렸어요. 민이에게 크로아티아는 이층침대랑 계단이랑 바다에서 물 먹은 거, 그리고 납작 복숭아로 기억되나 봐요. 복숭아만 보면 크로아티아 얘기를 하네요. 민이 가졌던 해에 복숭아가 달아서 엄청 먹었는데 그 덕분일까요. 아니, 그냥 납작 복숭아가 엄청 맛있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들 입이 있는데 민이 쟤만 다 먹는 건 너무 해요. 나이가 벼슬이냐.



엄마아빠는 밤산책을 나가시고 우리는 씻었지요. 그런데 돌아와서 엄마아빠가 너무 분하다는 거예요. 얘기인즉슨, 이 동네가 너무 예쁘고 정작 해수욕하기 좋은 바다가 바로 집 앞에 있었다는 거죠. 안 봐서 모르지만 왠지 저도 분한 마음을 안고 잠듭니다. 내일 아침 출발하기 전에 잠깐이라도 코 앞의 바다를 구경해야겠어요.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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