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브로브니크
아십니까. 오늘이 제 생일입니다.
한 해 한 해 나이 드는 게 마냥 반갑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두브로브니크에서 맞이하는 생일은 또 어찌 좋다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흔두 살(만으로는 마흔하나지만 그게 그거…)의 생일을 이국에서 보내니, 나이도 참 맛있네요. 잘 먹겠습니다.
내일은 한국으로 떠나는 날이라 여행은 오늘로 마지막입니다. 오늘은 특별한 계획 없이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를 돌아다니기로 해서, 아침 먹고 천천히 나가 플라차 대로로 향했어요. 큰 소비를 하거나 비싼 물건 사는 걸 무서워하는 저는, 대신 잔잔바리로 소소한 쇼핑을 자주 하는 편인데요. 내면에 부끄러움이 많아서 가게 들어가 물건 살피고 그런 걸 잘 못해요. 그런 저를 잘 아는 남편이, 마지막 날인데 사고 싶은 거 사라며 손을 잡고 가게마다 함께 구경을 시켜 줬어요.
그런데 이건 너무 비싸고, 저건 가져가기 너무 크고, 그건 한국에서도 살 수 있고 그래서 잘 안 사게 되더라고요. 정말 나이가 들었는지 물건 사는 데 심드렁해졌나 봐요. 그중에 유일하게 욕심나던 커피잔이 있었는데, 옆에서 엄마가 별로라고 해서 그냥 말았네요. 굳이 여기서 쓸데없는 데 돈 쓴다고 엄마한테 욕 얻어먹고 싶지 않은, 오늘로 마흔두짤입니다.
남편이 저를 데리고 함께 아이쇼핑을 즐겨줘서, 저도 남편이 좋아하는 왕좌의 게임 굿즈 가게에 갔어요. 여긴 무려 '공식' 판매처입니다. 지난번에 간 곳보다 물건이 더 괜찮아 보이는 것은 ‘공식’이라는 말이 주는 힘일까요? 컵과 접시와 피규어와 다양한 굿즈들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남편이 드디어 결정을 했습니다. 왕좌의 게임하면 바로 뭡니까. 왕좌요. 네, 왕좌를 샀습니다. 그건 좋은데 한국에 와서 제 책장 한가운데에 딱 놔뒀네요. 거슬려...
근데 이 '공식' 판매처는 굿즈를 사면 왕좌에 앉아 기념사진을 무려 공짜로 찍을 수 있다는군요. 아, 그런데 여기가 아니라고요? 여기 말고 나가서 조금 더 걸어가면 있는 또 다른 공식 판매처에서 영수증을 내면 된다고요? 뭐, 그렇게까지 해서 찍어야 되냐고 마다하려는데 엄마아빠가 극구 권하십니다. 찍어라,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 하시면서요.
돈 더 내는 것도 아닌데 그럼 기분이나 내자며 민이까지 데리고 사진을 찍었네요. 마음은 존스노우와 대너리스였는데, 실물은 그냥 조선의 불가촉천민이랄까요. 그래도 찍으면서 즐거웠습니다. 우리 딸이 제일 신났으니 어미아비는 그걸로 됐습죠, 예.
점심이 가까워지니 햇살이 너무 세져서, 쉴 겸 카페로 들어가 커피를 한 잔 마시기로 했어요. 예전에는 카페는 무슨요. 침 삼키고 물 마시고 견디는, 진짜 돌아보면 노동 같은 여행을 했는데요. 이제는 잠시 앉아 커피 마시며 이야기 나누고 풍경도 돌아보고, 그렇게 우리 삶에 여유가 가득해져서 좋아요. 셋에서 다섯으로 늘어나며 우리의 공기가 더 풍성해진 덕분이겠죠.
하지만 가끔 ‘쉴 틈이 없다, 다니자, 계속 보자, 걷자’며 기운차던 엄마아빠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릴 때가 있어요. 아침에 눈떠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활기차던 엄마아빠가, 점점 쉬어가고 느려지는 모습을 보면 두렵기도 하고요. 시간이 없다는 생각을 해요. 빨리 효도해야 하는데, 내가 더 잘해야 하는데 싶어 애가 탈 때가 있어요. 사람이 나이 드는 건 자연의 일이라 막을 수 없지만, 그래도 오래오래 지금처럼 같이 놀고먹고 여행 가며 오래 함께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구경도 다 하고 식사도 하고 숙소로 돌아와 짐을 정리했어요. 이제 정말 갈 준비를 할 때. 저녁은 뭘 먹을까 하다 나가기 귀찮기도 하고, 조용히 숙소에서 여행의 마무리를 하기로 했지요.
피자를 사 오려 남편과 민이와 숙소를 나섰습니다. 마침 근처에 작은 피자 가게가 있어서 들어갔는데 대기가 45분이네요. 다른 가게를 갈까 했는데, 어차피 걸어갔다 오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대기 시간이랑 비슷한 거예요. 그대로 기다려야 하나 정신이 아득해지려던 찰나, 여기가 배달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전화번호 남기고 결재하고 배달을 부탁드렸답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배달의 민족 아닙니까? 배달시키는 데는 도가 텄다 이 말입니다.
외국에서 배달 주문에 성공한 기쁨을 안고 숙소고 돌아와 쉬고 있으니 한 시간 뒤에 피자가 도착했어요. 다 같이 식탁에 둘러앉아 마지막 와인을 곁들여 먹고 마시고 이야기 꽃을 피웠지요.
한때는 참 불행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제가 가지지 못한 것, 부족한 점만 보느라 삶이 저에게 주는 것들에 감사하지 못했지요. 늘 불안하고 슬프고 화도 많이 났어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렇게 감사할 수 없는 인생이더라고요. 사랑하는 엄마아빠와 남편과 아이와 함께하는 이 충만한 시간이 저를 살게 합니다. 서로를 꼭 끌어안은 틈으로 기쁨과 행복이 꽉 차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 에쿠니 가오리는 '호텔 선인장'이라는 책에서 "계절은 아름답게 돌아오고 재미있고 즐거운 날들은 조금 슬프게 지나간다"라고 했어요. 어려서는 그냥 멋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이 문장을 떠올리면 한쪽 가슴이 시큰거립니다.
매번 계절들은 어찌 그리 기적처럼 모습을 바꿔 돌아오는지요. 그리고 그 계절 속에서 소중한 순간과 사람들을 붙잡아두려 해도 모두 바람처럼 머물지 못하고 흘러가 버립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시간이 존재했음을 기억한다는 것뿐이겠지요.
부모님도 남편도 저도 점점 나이가 더 들어가겠지요. 민이는 자꾸만 자라날 테고요. 언젠가 민이만의 세계가 더 커져서 우리 모두 그녀 삶의 변두리로 물러설 즈음이 되면, 우리는 다들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요? 무엇을 기억하며 또 무엇을 힘을 삼아 살아가게 될까요. 잘 모르지만, 지금 지었던 미소만큼 미래에 행복의 싹을 틔울 수 있을 거라 믿으며 현재를 더 충실히 지내려 합니다. 더 사랑하며 살려합니다.
크로아티아 여행도 이제 끝.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