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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Oct 22. 2023

해피엔딩같은 풍경

다시, 두브로브니크

어김없이 새벽같이 일어난 우리. 민이는 오늘도 계단을 오르고 내리고 쉼 없이 움직입니다. 민이를 보면 장소나 도구, 시간이 없어 운동을 못 한다고 말하는 건 정말 핑계구나 싶어요. 어디서든 체력을 단련하는 자랑스러운 저의 딸. 근육 그만 만들어라. 너무 단단해서 이제 너랑 부딪히면 많이 아프다.


도시를 떠나기 전에 아침 산책을 하는데, 맙소사.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놓치다니요. 맑은 바다가 얕게 저 멀리까지 퍼져있는데 속이 투명하게 다 보이고, 모래는 또 어찌나 고운지 걸어도 걸어도 보드라워서 실크를 발에 감은 것만 같아요. 길은 새로 정비되었고 샤워 시설도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어 그야말로 바다수영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네요. 심지어 집 앞이라 그냥 놀다가 달려들어가면 될 것을, 우리는 왜 길가에 차를 대고 그 안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갖은 몸부림을 쳐야 했던 걸까요? 그 와중에 이렇게라도 바다수영을 하게 되었다고 자랑스러워하던 나 자신, 부끄럽습니다. 진짜 등잔밑이 어둡네요. 


이 원통하고 분통한 마음의 화살은, 오미스를 가자 했던 엄마가 받게 되었지만 사실 다들 알고 있지요. 오미스를 가지 않았다면 그것도 후회가 됐을 거라는 걸요. 그냥 이 나라가 여기저기 매력이 흘러넘치는 탓인 걸 누굴 탓하겠어요.

아쉬운 마음에 바다에 발을 담그며 마음의 위안을 삼아봤어요. 카스텔 노비는 현재 구 해변에 더해서 새 해변을 정비하는 중이던데요. 만약 다시 오게 된다면 그때는 또 많이 바뀌어있겠죠. 도시가 커지고 사람들이 늘어나면 오래되고 낡은 것들은 지워지기 쉽잖아요. 지금의 모습이 사라진다면 아쉽겠지만, 우리는 여행자니 아쉬움은 잘 접어 마음속에 가지고 갑니다. 사는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당장 수영복을 입고 다시 나온다 난리 치는 민이를 어르고 달래 겨우 도시를 떠납니다. 오늘은 다시 두브로브니크로 돌아가요. 내륙 도로를 달리면 3시간 코스인데, 바다를 보며 달리기 위해 해안 도로로 경로를 바꾸니 5시간이 걸린다네요.

여보,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이 여행은 남편을 위한 여행이라 이름 붙이고, 남편이 고생하는 여행이 되었네요. 어쨌든 저와 민이를 위한 변경은 아니었다고 변명해봅니다. 왜냐면 저희는 코 골고 잤으니까요. 그냥 효도 관광이라 생각하기로 했어요. 엄마아빠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절경에 많이 행복하셨다니 남편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그렇게 긴 드라이브 끝에 다시 두브로브니크로 돌아왔어요. 같은 숙소를 할까 하다 다양한 곳을 경험하고 싶어 다른 숙소를 구했는데요. 지난번과 달리 이번 숙소는 쉽게 못 찾겠더라고요. 호스트가 지도며 찾아오는 방법을 상세하게 적어주었는데, 막상 주소에 적힌 곳에 가니 뭔가 조금 달랐어요. 한참을 헤매다 결국 국제전화로 호스트에게 연락을 했는데 설명을 들어도 집이 보이질 않아 난감하더라고요.

그런 순간에 귀인이 나타났답니다. 옆 집에서 일하는 착한 언니가 같이 돌아다니며 찾아줬어요. 아시죠? 멋지고 착하면 다 언니예요. 저희보고 기다리라 하고 혼자 이곳저곳 다니며 알아봐 줬답니다. 정말 다정하고 사랑스럽던 사람. 덕분에 더 오래 헤매지 않고 숙소를 찾아갈 수 있었어요. 고개가 떨어져라 감사 인사를 했지만 마음을 전하기 한참 부족했어요. 낯선 곳에서 만난 이 소중한 친절을 잊지 않고, 저도 다른 사람들에게 꼭 갚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어요.


그나저나 옆 집이 진짜 크고 웅장하고 부내가 넘쳐서 대체 누구네 집인가 했는데요. 알고 보니 굉장히 프라이빗한 호텔이더라고요. 나중에 성공하면! 여기서 묵을 겁니다. 기다려라, 로또만 되면 내가 바로 온다! 그게 언제일지 모르지만 꼭... 어쨌든 이 호텔 덕분에 저녁에 발코니에 서서 보는 풍경이 더 멋졌답니다. 밤마다 라이팅도 환상적이었고요, 잘 가꿔진 정원으로 노을이 내려오면 천국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짐을 풀자마자 남편과 저는 차를 반납하러 유니렌트로 향했어요. 3시 30분까지였는데 3시 25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했지요. 반납을 마치고, 둘이 나온 김에 근처 해변에서 잠시 데이트를 했어요. 저희는 그냥 그늘에서 편히 쉬면서 이야기나 하려던 건데요. 동네 자체가 거대한 리조트 단지라 수영하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남편과 저는 이런 분위기가 낯선 데다 동네와 너무 동떨어진 차림을 한 탓에 오히려 눈에 확 띄는 이방인이 되어버렸어요. 결국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답니다. 

엄마아빠와 통화를 하니 민이랑 셋이서 벌써 식사를 했다며 둘이서 밥 먹고 오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슬슬 걸어서 식당을 찾는데, 아무리 걸어도 식당이 없는 거예요. 집 쪽으로 걸어가며 찾아도 찾아도 식당은 보이지 않고 한 시간이 넘게 걷기만 했어요. 저기 뭐 있다, 하고 가면 그냥 카페고요. 저기 뭐지, 하고 보면 그냥 상점이고요. 저기 뭘까, 하면 문을 닫았네요. 그래도 둘이 있으면 이런 상황도 마냥 웃기고 재밌기만 하니 그야말로 천생연분인가 싶어요.

결국 다섯 시 다 되어 숙소에 도착해서 햇반과 라면으로 식사를 했어요. 여행 올 때는 비상식량 쓸 일이 뭐 있겠나 싶었는데, 아주 요긴하게 쓰이네요. 더 사 올 걸 그랬어요.


해 질 무렵이 되어 다시 집을 나섭니다. 십 년 전 크로아티아 여행에서는 스르지산에 오르지 않았어요. 그때는 두브로브니크의 다른 곳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고요. 노을은 굳이 스르지산이 아니라도 어디서든 충분히 멋졌으니까요. 

하지만 이번에는 아빠가 꼭 케이블카를 타보자고 하셔서 다 같이 따라나섰지요. 그런데 티켓을 살 때 엄마가 아빠 카드로 결제를 해버리셨어요. 여기 와서 결제는 주로 경비가 담긴 체크카드를 썼거든요. 당연히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나타난 아빠의 개인 카드에 황당해하는 아빠의 얼굴은 그야말로 이번 여행의 포토제닉이라 할 만합니다. 이건 계획에 없었는데 하는 표정. 역시 아빠 놀리기는 엄마를 따라올 자가 없습니다. 아빠, 파이팅!



별로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막상 올라가 보니 말할 수 없이 좋은 거 있죠. 두브로브니크 시내가 다 내려다보이는 건 물론이고요. 저 멀리 하늘과 맞닿은 곳까지 바다가 이어지는데, 그곳으로 해가 떨어지면 온 세상이 마법처럼 붉게 물드는 거예요. 동화에서 마지막 해피엔딩이 나오는 장면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을 만큼 아름다워요. 

이곳에 뷰가 환상적인 레스토랑이 있거든요. 노을을 바라보며 식사를 하면 가족들에게도 행복한 기억으로 남겠지 싶어 예약하려 했는데 아쉽게도 자리가 없더라고요. 한 달 전부터 시도했는데 실패한 거면 그냥 저희 자리가 아니었던 거겠죠.  



대신 스르지산을 내려와 아빠가 봐두었던 레스토랑에 갔어요. 낮에는 분명히 한산했던 기억이 있어서 괜찮을까 싶었는데, 밤에 보니 손님이 가득하고 분위기가 참 좋더라고요. 저는 밤에 안 나가서 몰랐는데 엄마아빠는 밤산책을 하셔서 아시더라고요. 일단 플레이팅이 예쁜데 맛도 좋고, 흘러나오는 음악과 분위기에 낭만이 가득하고요. 사람들도 친절하고, 밤공기는 상쾌하고, 가족들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고 너무너무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민이는 초콜릿 무스 하나로 세상을 다 가졌지요. 아이가 먹으며 “오늘 너무 행복한 하루였다”라고 하니 저희도 더 행복해졌어요. 민이는 알까요? 자신의 행복이 우리 모두의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걸 말이에요. 민이는 존재 그 자체로 충분한, 최고의 선물이에요. 그리고 민이뿐 아니라 우리 가족이 서로가 서로에게 최고의 기쁨이지요. 항상 감사하고 또 감사한 날들이에요.



이 시간이 흘러가는 게, 여행의 막바지라는 게 너무 아쉬운 밤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밤이에요.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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