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adache Jul 16. 2020

욕망은 결핍에서 시작되는 걸까? 그 반대일까?

결혼기념일 날 저녁, 햄버거 스테이크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은 아마도 남편일 것이다. "아마도"라는 마지막 자기 검열 앞에 잠깐의 주저함이 있기는 해도 될수록 남편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한다. 물론 남편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뭘 맞춰준다는 거야?"라고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고 있다. "심지어 남편 역시 나에게 맞춰 주며 살아간다고 생각할 것이다".......라는 문장을 쓰려는데 순간 화가 치민다. 남편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에 대해서는 1도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나는 지금 남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퇴근하는 길, 집 근처에서 우연히 남편의 뒷모습이라도 만나면 반가워서 뛰어가 그의 손을 잡고 "자기야, 이렇게 우연히 만나서 참 좋아"라고 말하며 일부러 그를 난처하게 만들려고 프랑스식 얼굴 뽀뽀를 하는 척 그의 얼굴에 내 얼굴을 들이밀면 남편은 "왜 이래. 여기서 이러면 안 돼"라고 말은 하면서도 활짝 웃으며 내 손을 잡았는데, 지금 나는 그런 다정했던 기억에 마저도 화가 난다. 화가 난 나는 우연히 길에서 남편을 마주치면 남인 듯 모른 채 걸어간다. 그 외면의 순간 다정했던 기억이 나를 더 괴롭게 만든다. '저런 인간이 뭐가 좋다고 내가 그랬을까?' 그래서 더 화가 난다.    


결혼식에 초대되어 가 꽃같이 아름다운 행복한 신부의 미소를 볼 때 그 순간 그녀의 행복이 조금도 부럽지 않다. 이제 그녀는 짧은 신혼을 마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자신을 돌보지 못한 채 출산과 육아의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순간 그녀의 행복이 안타깝기까지 하다. 천만다행으로 남편이 육아와 가사를 성실히 분담하고 아내를 소중이 여길 줄 아는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서 그녀의 길고 어두운 터널이 외롭지 않기만을 바란다. 서로를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사랑이 모든 사람의 축복을 받는 결혼에 이르러 닥쳐오는 팍팍한 일상으로 인해 결국 무덤덤해지고 때로는 서로에게 사나워질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기에 이제 막 아내와 남편으로서 맹세를 하는 그들의 행복한 모습 앞에서 나는 이미 경험한 사람으로서 굳이 안타까워한다. 결국 남루해질 것을 알면서도 한눈에 반해 사게 되는 새 옷과 같다고 결혼에 대해 냉소적인 얼굴로 앉아있기는 하지만 그런 나도 결혼식의 행복한 신랑 신부에게서 부러운 한 가지는 그들이 예식을 마치고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다. 그들의 신혼여행은 부럽다. 아마도 내가 신혼여행을 가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아마도"라는 단어를 이번에는 빼야겠다. 내가 신혼여행 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내가 신혼여행을 가지 못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백 퍼센트 확실하다. 가보지 못한 여행의 달콤함, 경험하지 못한 행복에 대한 부러움 때문에 다른 이들의 신혼여행 이야기를 들을 때 내 얼굴은 웃으며 "정말 좋았겠다" 맞장구를 치지만, 내 마음은 결핍의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남동생이 결혼을 하고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와 내게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에서 샀다며 기념품인 푸른색 펜을 건넸을 때도 부러움과 질투심 때문에 피붙이임에도 불구하고 동생의 행복을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 주지 못했다. 결핍은 다른 이의 행복조차 질투하게 할 만큼 거세게 나를 흔들어 내 욕망을 부채질한다. 그렇다면 욕망은 결핍에서 시작되는 걸까?     


배우자에게서 내가 기대하는 모습을 발견할지 못 할 때, 그가 나를  좀 더 소중히 여겨주기를 바랄 때 스스로가 가여줘진다. 휴일 오후 집 앞 공원에 나가 아이들과 캐치볼을 하며 놀아주는 아빠를 보며 '저 아빠는 참으로 자상하구나', '저런 아빠가 있어서 저 아이들은 참 행복하겠구나', '엄마 혼자 지내도록 아이들과 밖에 나와 놀아주는 남편이 있어 저 아이들의 엄마도 참 행복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남편과 두 아이 모두 각자 자기 방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참 쓸쓸해진다. 아이들과 캐치볼 하는 남편을 둔, 얼굴도 모르는 여자의 행복이 부러워서 쓸쓸해진다. 그리고 톨스토이의 그 유명한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린다. 나는 불행한가? 좀 더 다정한 아빠 다정한 남편이 되어 줄 수는 없는 걸까?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나의 욕심 때문일까? 남편은 지금도 충분히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인데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남편에게 바라는 게 많아서 나는 불행한걸가? 나는 만족을 모르는 걸까? 그러나 지금 나에게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은 마치 여우의 신포도처럼 들린다. 탐스러운 포도가 달려있는 먹음직스러운 포도 넝쿨이 너무 높아서 아무리 뛰어올라도 먹을 수 없게 되자 "저건 틀림없이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현실에 만족하는 자신을 두둔했던 이솝 우화의 여우.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와 같이 적당히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내 삶에 몰아쳐 오는 쓸쓸한 파도를 견디면서도 '나는 행복하다'라고 생각하기로 결심한 것처럼. 마치 너무도 행복한 신랑 신부를 보면서도 그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전혀 알지 못하는 내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그들의 결혼생활이 사랑의 윤기를 잃고 시들어 갈거라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오후에 직장에서 "비 오는 날 당신 생각을 많이 해요.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그 사이의 시간에도요."라는 글귀를 보고 습관처럼 남편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몹시 나무랐다. '아니야, 아니야!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말라고!' 애틋한 사랑의 감정 앞에서 어김없이 남편을 떠올리는 내가 짜증스러웠다. 남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때 파뿌리 앞에서 나는 잠시 숙연해진다. 우리 결혼식의 주례 선생님의 주례사에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행복하게 살아라"는 말이 있었는지 지금은 기억에도 없지만 왠지 남편이 미워지는 마음을 갖고 파뿌리를 보면 내가 서로 영원토록 사랑하겠다는 결혼의 맹세를 저버린 듯하여 죄책감이 든다. 죄책감을 잘라내듯 댕강 파뿌리를 잘라 냉동실에 얼른 넣어 두었다. 다음에 밑국물 우릴 때 멸치와 함께 넣으려고. 그렇게 우려낸 국물로 또 밥상을 차려 낼 것이다. 남편이 밉든 말든.

이전 10화 술 마신 남편을 위한 아침밥상, 콩나물 해장국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