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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dache Sep 01. 2019

갓 지은 밥으로 차린 점심상, 아쉬움 반 편안함 반

다른 집에서 돌아왔다. 다른 사람이 해주는 밥도 이제 끝났다.

4박 5일의 여름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회사에 길게 휴가를 내지 못하는 남편은 새벽 비행기에서 내려 아이들과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곧바로 출근을 했다. 그리고 채 여독을 풀지 못한 피곤한 얼굴로 다음 날 야근을 하고 아침에 퇴근해 곧바로 벌초를 하러 시댁에 갔다. 휴가지에서 무슨 일 때문인지 열한 살 작은 아이가 볼멘소리를 하자 "기서는 화내지 말고 재밌게 놀기만 하는 거야. 돌아가면 너는 학원 가고, 숙제하고, 아빠는 하러 가잖아. 맛있는 거 먹고 신나게 노는 것도 딱 하루밖에 안 남았어."라고 말하던 남편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 하기 위해 두 눈 가득한 피곤함을 털어버리지 못한 채 집을 나서는 그가 안쓰러웠다. 제 휴가는 끝나고 다시 일상이 시작된 것이다.


작은 아이가 서너 살이었을 때 그 아이는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늘 다른 집에 가자고 를 썼다.

"이제 우리 어디가?"

"집에 가."

"다른 집?"

"아니, 우리 집."

"싫어! 다른 집에 가! 다른 집! 다른 집!"

 아이가 말하는 다른 집은 호텔이나 펜션 같은, 우리 집이 아니지만 우리가 집처럼 머무는 곳이다. 어린 마음에도 여행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아쉬웠던 모양이다. 그러나 영원히 다른 집에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우리는 다른 집에서 우리 집으로 늘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여행이 끝나고 우리 집 문을 여는 순간, 나는 다른 이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아먹는 좋은 시간이 끝났다는 게 몹시 아쉬웠다. 제 밥때가 되면 내 손만 바라보는 세 남자의 밥상을 매일 차려 내야 한다. 매일 상을 차리면서 또 매 번 새삼스러운 질문, '무엇을 해 먹지?'에서 시작해, 장을 보고, 음식을 하고, 물기 없이 닦은 수저를 가지런히 놓고, '밥 먹자'라고 부르는 것으로 끝나는 상차림의 반복. 수고스럽고 싫증 나는 일이다. 그러나 여행지의 낯선 음식에 당황해 늘 먹는 음식이 그리워지는 순간이 있다. 향신료 향이 강하고, 너무 짜고, 때로는 무슨 맛인지 알 수 없는 음식을 삼켜야 할 때, 밥상에 언제나 오롯이 놓여있는 김치를 방금 한 밥에 올려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때가 있다. 더 이상 누릴 수 없을 때 그리워지는 당연함. 수고롭지만 또 돌아갈 수밖에 없는 나의 즐거운 식탁을 오픈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벌초를 하고 돌아온 다음 날이 마침 쉬는 날이지만, 지런한 성격의 남편은 피곤해도 오래 누워있지 않는다. 평소처럼 일어나 우리 집 여름철 아침 메뉴인 아메리칸 블랙퍼스트를 먹고 헬스장에 운동을 하러 간다. 나는 피곤한 남편에게 제대로 된 한식 밥상을 차려주고 싶어 얼른 장을 봐와 밥을 안치고,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김치찌개를 뭉근하게 끓도록 불에 올려다. 시어머님께서 벌초하러 간 남편에게 들려 보낸 애호박얇게 썰어 살짝 데친 뒤, 새우젓 양념으로 볶아내고, 알싸한 청양고추를 다져 넣어 가지도 매콤하게 볶고, 남편이 좋아하는 고등어도 굽는다. 휴가 전에 고추장 양념에 무쳐둔 더덕이 알맞게 맛이 들었다. 장아찌 접시 옆에 더덕 무침을 소복이 덜어 담고, 국물이 많은 여름 김치도 곁들인다. 점심상 치고는 손이 많이 간 밥상이지만 이국의 낯선 음식에 지친 입맛에 딱이다 싶다. 습기가 줄어들어 부드러워졌지만 여전히 따가운 햇살이 쏟아지는 여름의 끝자락, 땀을 뻘뻘 흘리며 김치찌개를 먹고 만족해하는 식구들을 보며 나의 수고로움을 보상받는다. 무사히 여행에서 돌아와 이렇게 식구 모두 식탁에 함께 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는 일상으로의 복귀가 다행스러워, 다른 집에서 다른 사람이 해주는 밥을 먹는 여행이 끝난 아쉬움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낸다.


지난봄 오일장에서 사 온 더덕의 껍질을 벗기고 두들겨 처음으로 더덕 무침을 만들었다. 그 더덕 무침의 맛이 좋았던 모양인지 남편이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은 채 홈쇼핑에 나오는 더덕을 주문했다. 껍질 벗겨 진공 포장되어 온 더덕이 다섯 팩이나 되었다. 여행을 앞두고 미리 예약한 현지 투어도 체크하고, 발이 자란 아이들 아쿠아 슈즈도 사고, 비상약도 준비하고, 선크림도 챙기느라 바쁜 와중에, 여러 날 집을 비울 것을 대비해 될 수 있으면 냉장고에 있는 음식을 다 먹어치우고 냉장고를 비워두고 갈 요량으로 새로 장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에 떡 하니 배달된 더덕을 보고 있자니 짜증이 확 몰려왔다.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언어가 다른 나라로의 여행을 앞두면 늘 긴장된다. 미리 예약한 호텔에 정말 우리가 잘 방이 있을지, 현지 투어가 별 무리 없이 진행될지, 내가 세운 여행 계획이 최선인지, 여권은 잘 챙겼는지, 걱정이 백 개는 된다. 호텔과 항공권의 예약이 끝나면 자질구레하지만 중요한 대부분의 준비는 내가 하고, 남편은 환전과 와이파이, 여행지에서의 이동수단을 맡아 준비한다. 나의 체크리스트는 수십 가지가 넘지만 남편의 체크리스트는 네다섯 개밖에 안된다. '이렇게 바쁜 나에게 더덕 무침까지 하라는 거야?'라고 내뱉고 싶었지만 또 더덕을 보니 이대로 두고 가면 여행에서 돌아와 이 더덕을 버려야 할 것 같아 아까운 마음이 든다. 버릴 수는 없지 않나 싶어 한 팩을 잘라 더덕의 향을 맡아보니 향긋하다. 다섯 팩을 모두 씻어 두들겨 찢어 보니 꽤 양이 많다. 봄에 시어머님이 보내주신 아카시아 꿀에 고추장과 매실청, 간장을 넣고 버무려 통에 담으니 작은 김치통으로 한 통이다. 그렇게 더덕무침까지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 놓는 것까지가 이번 여행의 준비였다. 짐을 싸기 위해 거실 바닥에 며칠 동안 펼쳐놓은 두 개의 캐리어를 더덕 무침을 다 만들고 나서야 닫을 수 있었다. 여행 준비로 바쁜 내게 더덕 무침까지 만들게 하는 남편에게 살짝 짜증 내면서.


그런데 막상 여행에서 돌아와 앉은 식탁에서 향긋하게 아삭아삭 씹히는 더덕이 위로가 된다. 우리가 집을 비운 사이 먹기 좋게 맛이 든 더덕이 마치 우리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만들 때 남편을 향해 돋아나던 짜증도 여행에서 돌아와 쉬지도 못하고 출근하고 벌초하러 가는 남편을 보며 측은함으로 바뀐다.


이렇게 또 한 번의 여행이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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