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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dache Jan 15. 2020

술 마신 남편을 위한 아침밥상, 콩나물 해장국

측은함의 발현

나는 술을 좋아한다. 휴일 오후 청소를 마치고 빨래를 탁 털어 널고 식탁에 앉아 마시는 맥주 한 잔의 여유와, 퇴근 후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피곤함을 짊어지고 식구들의 저녁상을 준비하면서 나에게 건네는 맥주 한 캔의 위로를 즐긴다. 마음이 맞는 여럿이 어울리는 왁자지껄한 술자리도 좋아하지만 그럴 때는 술보다는 그들과의 어울림이 더 즐겁다. 느슨하게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순간에 또는 눈 앞의 괴로운 순간을 덜 괴롭게 받아들이고 싶은 순간에 마시는 그 한 잔을 좋아한다.


그 한 잔이 여러 잔이 된 다음 날 아침 내 속을 달래주는 콩나물. 어렸을 적 겨울방학에 할머니 댁에 가면 뒷 방 한 구석에 검은 천으로 덮어놓은 항아리 속에서 노란 싹이 쑥쑥 자라나고 있었다. 물만 주어도 쑥쑥 자라는 그 여리여리한 식물이 나는 참으로 신기했더랬다. 할머니가 콩나물로 어떤 음식을 해 주었는지는 기억이 없지만 여린 발이 나온 노란 콩나물 위로 한 바가지 물을 뿌리면 콩나물을 흠뻑 적시고 졸졸졸 떨어지던 물줄기 소리에 까르르 투명한 웃음을 터트렸던 나를 기억한다. 할머니가 이제 그만 되었다고 해도 "한 번 만 더! 한 번 만 더!" 하며 바가지에 물을 떠 담아 자꾸자꾸 콩나물시루에 물을 졸졸졸 흘러내렸더랬다. 어린 나에게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장난이었다. 집에서는 나의 작은 잘못에도 나를 혼내는 엄마 때문에 어리광 한 번 부리지 못하다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삼촌들이 있는 할머니 댁에서 나는 '오냐, 오냐' 응석받이 귀한 첫 손주 노릇을 할 수 있었다. 그런 행복한 기억을 가진 콩나물이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술을 마신 다음 날 나의 속을 달래주고 있으니 나에게 콩나물은 참으로 대견한 음식이다. 술을 좋아하는 나. 그런 내 속을 달래주는 콩나물. 아름다운 조합이다.


내가 술을 좋아하니 남편이 술 마시는 것에 대해서도 나는 크게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아침에 출근할 때 저녁에 술 약속이 있다고 말하면 "알겠어. 늦을 것 같아?" 이렇게 묻는 것이 내가 남편의 집 밖 음주에 대해 참견하는 것의 전부다. 그리고 쉽게 끝나지 않고 늦어지는 술자리일 것 같으면 미리 콩나물을 사놓는다. 콩나물을 듬뿍 담아낸 뚝배기에 진하게 우려낸 멸치 다시마 육수를 부어 끓이다 다진 마늘을 넣고 새우젓으로 간을 한 다음 펄펄 끓을 때 불을 끈다. 아직도 끓고 있는 뚝배기에 날달걀을 깨뜨려 넣고 잘게 썬 파와 깨소금을 뿌리고 참기름을 몇 방울 떨어트리면 숙취에 속을 풀어줄 뜨끈한 콩나물 해장국이 완성된다. 미리 멸치와 다시마를 우려낸 육수만 있다면 참으로 간단하고도 대견한 음식이다. 뚝배기를 깨끗이 비운 남편의 만족한 얼굴에 "어젯밤에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야?"라고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온 남편이 응당 들어야 하는 잔소리를 한마디 함으로써 나는 '해장국을 끓여주기는 하지만 너의 행동이 전적으로 이해받고 위로받을 만한 장한 것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남편에게 확인시키고 남편은 그 한 마디를 듣는 것으로 자신의 음주 후 늦은 귀가를 용서받는다. 남편의 음주 후 늦은 귀가에 대해 이보다 더 쿨한 아내가 어디 있겠는가?


물론 이 쿨함은 자발적이지 않고 지층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서 쌓인 일종의 익숙함과 포기 그리고 이해에서 나온 습관 같은 것이다. 남편을 열여덟에 처음 만났다. 교복을 입고 바쁘게 등교를 하다 보면 남편이 탄 자전거 바퀴가 반짝이며 수줍은 아는 체를 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94학번 새내기가 되었다. 어제 드라마를 다시 보기로 1회를 보는데 "1994년" "26년 전"이라는 자막이 나왔다. 깜짝 놀랐다. 정말 깜짝 놀랐다. 어제보다도 더 선명하게 기억되는 내 청춘의 가장 행복했던 때가 벌써 26년 전이라니. 그리고 그때가 아주 오래전을 나타내는 시간의 설정이라니. 내가 그 아름다웠던 시간에서 이렇게 멀어졌다는 것이 너무 새삼스러웠다. 그리고 그 시간을 어찌어찌 남편과 함께 지나왔다니 나는 그와 참으로 오랜 시간을 알아 오고 있구나 싶었다. 청춘에서 이렇게나 멀어져 마흔의 중반에 있는 내가 슬프기도 하고 남편과 함께여서 다행이라고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나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아침에 나보다 더 빨리 집을 나서 출근하는 남편의 뒷모습은 언제나 어딘가 조금 짠하다. 그 짠 함을 희석시키기 위해 출근하는 남편을 최선을 다해 배웅하고 싶다. 저 혼자 기분 좋게 술 마시고 밤늦게 들어온 것에 대해 언짢아지기도 하지만 이제 알코올을 분해하기 점점 힘들어지는 나이를 이끌고 또 일하러 가는 남편을 위해 뜨끈한 한 그릇을 끓여내 그의 속을 풀어주고 싶다. 결혼 18년 차. 함께 자식 낳아 기르며 긴 시간을 지나오면서 쌓여가는 남편에 대한 측은함이 내가 좋아하는 콩나물로 발현된 오늘 아침 그를 위한 밥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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