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대화

가볍게, 아무 말

by 해다니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곳에서는 걱정 없는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상했던 예산을 훌쩍 넘는 순간이면 잠깐 주춤하고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긴 한다.

그렇지만 그 걱정마저도 일상에서 벗어난 풍경과 낯선 사람들의 온기로 덮인다.


어느 날, 낯선 해변에서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검게 그을린 피부에 금발머리의 여자가 햇살을 가리며 나에게 말했다.

"오늘 날씨, 참 좋죠?"


그녀의 옆에 있던 뚱뚱한 대머리 아저씨는 내 어깨를 힐끗 보더니 웃으며 덧붙였다.

"너, 오늘 하루를 제대로 즐긴 모양이네. 여긴 태양이 강하니까 수영할 거면 꼭 선크림 챙겨!"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모르는 사람들이 건네는 아주 가벼운 말.

그 안에는 누구의 삶도 무겁게 얹히지 않았고, 말이 칼이 되지 않았다.


그늘은 그저 눈앞의 날씨를 말했고, 지금 내 얼굴의 햇살을 얘기했고,

이 여름을 함께 지나가는 사람처럼 가볍게 웃으며 지나갔다.


이런 게 좋았다.


돈, 미래, 취업, 건강, 가족 등에 대한 걱정들이 없는 세상.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의 걱정이 말속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그 걱정은 어느새 나에게도 스며든다.


서로의 걱정들을 주고받으며, 고여있던 내 걱정 위로 그들의 걱정까지 쌓여갔다.


걱정은 옮겨진다.

그래서 나는, 걱정 많은 내가 말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내 무거움을 누군가에게 옮기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나는 쓸모없는 대화가 하고 싶다.


"오늘 바람이 기분 좋네요."

"이 돌멩이 강아지 닮지 않았나요."

"음식이 정말 맛있네요."


쓸모없는 대화가 하고 싶다.

아무 의미가 없어서, 오늘 이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다 휘발되어 사라질 이야기.


그런 무해한 말들.

의미도 무게도 없는, 그래서 오히려 숨통이 트이는 말들.


누구도 찌르지 않고,

누구도 탓하지 않는 이야기.


쉬는 대화가 하고 싶다.

기억나지 않아도 괜찮은 대화.


그 대화들이 머릿속을 떠날 때,

내 머릿속에 오래 자리 잡고 있던

걱정과 우울도 같이 손잡고 날아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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