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 사람들
내가 해야 하는 일의 흐름은 다음과 같았다.
1. 사용한 모든 영수증을 가져오면 전산에 입력을 한다.
2. 영수증을 a4에 증빙서류로 부착 후 첨부파일을 만든다.
3. 출력물과 증빙서류들을 pd들에게 전달 후 승인을 받는다.
4. 승인이 완료된 서류를 사무국 서랍에 넣는다.
5. 각 담당자들이 서류와 전산내용을 확인한 뒤 승인 한다.
6. 최종 승인된 서류를 경영지원팀에 가져다 놓는다.
7. 경영지원팀에서 확인 후 승인 또는 반려를 한다.
8. 승인이 되었다면 끝, 반려가 되었다면 서류를 가져오고, 전산처리된 내용을 취소한다.
9. 1번부터 반복작업을 한다.
나는 이 흐름 중에서도 특히 '3번'단계의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서류가 내 손을 떠난 순간부터.
A선배는 일처리가 굉장히 느린 편이었다. 얼마나 느렸냐면 '주토피아' 애니메이션이 처음 나왔을 때, 거기에 나오는 나무늘보를 보자마자 퇴사한 지 몇 년이 흘렀음에도 단박에 그 사람을 떠올릴 정도였다.
A선배의 깡마른 체형에 은색테 안경을 쓰고 격자무늬 셔츠를 즐겨 입었다. 외모만큼이나 그의 일처리 방식도 깐깐하고 확고했다.
분명 저번달과 같은 항목을 같은 코드로 처리했음에도, 그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그것이 정말 맞는지, 왜 그 코드로 처리했는지 물어왔다.
"00 프로그램, 00 사용료가 있는데 이 코드 맞나? 이건 비용계정이 달라지지 않나?"
"그거 저번달에도 그 코드로 처리했는데요?"
"재무팀에 전화해서 확인해 볼래?"
"그거 저번달, 저저번달에도 나갔던 돈이에요."
"아니 그러니까 한번 더 확인해 보라고, 이 비용계정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
"네."
매달 지급되는 고정 금액이었기에 그 부분은 잘 못 될 부분이 전혀 없는 내용이었다. 그의 깐깐한 성격 때문인 것인지 아니면 나를 믿지 못했던 것인지, 자신을 믿지 못했던 것인지 몇 번의 확인 전화를 하고 나서도 승인을 해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매일 재무팀에 전화를 걸어야 했다.
"00 프로그램에서 이런 부분으로 금액을 사용했는데, 이 코드로 처리하는 게 맞을까요? 저번 달에는 이 코드로 처리를 했는데, 혹시 잘못된 부분이 있었을까요?"
"해당 코드로 처리하시면 됩니다."
재무부 직원님은 늘 웃으며 나에게 대답해 주었다.
"제가 전화로 확인했는데, 이 코드로 처리하는 게 맞다고 하시네요. 제발 그러니 승인 좀 해주세요."
내가 승인에 목숨을 거는 것은, 단순히 일처리만 늦어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각 프로그램마다 예산이 정해져 있었다. 연간 예산을 짜서 한 달씩 나누어 사용했는데, 금액을 적게 쓰면 이월이 가능했지만, 예산을 초과한다면 추가 예산을 받아야 했다. 여러 사람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복잡한 과정이었고, 그 과정이 길어질수록 자연스럽게 돈이 늦게 지급되었다.
예산은 전년도 사용 금액을 기준으로 책정되는데, 매년 오르는 물가와 인건비, 예상치 못한 상황들로 인해 예산 초과는 늘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전산처리는 더욱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작가들의 월급이 늦어지고 거래처에 지급금이 다음 달로 밀리면, 모두 생계가 걸린 문제라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원망의 소리를 고스란히 내가 들어야 했다. 옆자리에 앉은 그들의 눈총을 받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이번에도 늦어져요? 왜요?"
"아, 그게... 확인하실 게 있다고 하셔서요."
"저, 진짜 적금까지 해지해야 할 판이에요. 제발 돈 좀 제때 넣어주세요."
"네네, 죄송합니다."
그들의 원망이 끝나고 나면, 바로 전화가 울렸다.
"00 거래처인데요."
"아, 안녕하세요."
"저번 달 사용료도 안 들어왔는데, 이번 달도 아직인 건가요? 확인 좀 부탁드려요. 정말 힘들어서 그래요. 방송국이라고 믿고 했는데, 왜 매번... 아휴."
나중에는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쿵 내려앉으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나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왜 전산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을 굳이 종이 서류로 해야 하는 걸까? 애초에 이 복잡한 시스템 자체가 문제였다. 이 종이 한 장 때문에 일처리가 늦어지기 일쑤였다. 전산처리만 하면 어디서든 승인받을 수 있을 텐데, 도대체 왜 이 종이쪼가리를 전달해야 하는지.
외부 스케줄이 많거나, 잦은 회의로 자리를 비우는 pd 님들에게 매일 전화해야 했다.
"안녕하세요. 저 행정 00인데요. 혹시 오늘 자리에 언제 들어오세요? 아, 다름이 아니라 서류 올려놨는데 그거 승인 좀 부탁드릴게요."
"어쩌지, 오늘은 오후 늦게나 들어갈 거 같은데..."
"아, 그러면 제가 다른 피디님한테 받을 테니 전산 시스템이라도 먼저 승인 부탁드릴게요."
이렇게 굽신거리면서 승인을 받고 나서, A선배에게까지 나의 서류가 도달하면 거기서 최소 3일은 묶여 있어야 했다. 그 선배는 늘 자리에 앉아서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도대체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몇 번이고 담당자를 바꿔달라 팀장님에게 민원을 넣었다. 팀장님도 다른 사람들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주의를 몇 번 주었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아휴, 저걸 데리고 사는 인간도 있는데 우리는 그나마 양반이지."
팀장님은 답답한 얼굴로 나를 다독이며 이야기하셨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담당자 다른 사람으로 바꿔주세요. 제발."
"이미 그 민원은 들어올 때로 들어와서 더 이상 담당자를 바꿀 수가 없어."
"그러면 프로그램을 바꿔주세요. 제발."
사람손을 거치는 일이다 보니 그런 상황을 다 고려하다 보면 다음 달로 금액이 미뤄지는 일이 많았다. 그런 것을 잘 알기에 처음부터 꼼꼼하게 검사해 주는 A선배의 일처리 방식이 맞다고는 볼 수 있지만, 그 꼼꼼함이 늘 민원사항을 만들어냈다.
나중에는 그 선배를 찾아가 저번달과 저저번달 처리내역을 보여주며 말했다.
"여기 보면 저번달 저저번달 다 이 코드로 처리를 했고, 선배님이 승인해 주셨는데 왜 이번 달은 안된다는 건데요?"
"아? 그래? 알았어. 그럼 지금 처리해 줄게."
"아니, 도대체 왜... 혹시 어떤 이유가 있으셨어요?"
"지금 해준다니까. 자리로 돌아가."
그 순간 나는 허탈함과 동시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토록 오랫동안 나와 동료들이 겪은 고통이 그에게는 그저 '지금 해준다.'는 한마디로 끝나는 일이었던 것이다.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를 내가 퇴사할 때까지 질질 끌고 간 이유가 무엇인지 여전히 미스터리다. 그가 자신 외에 다른 사람들을 믿지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근무태만이었던 것인지.
'꼼꼼함'이 과연 '일을 잘하는 것'과 같은 의미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적어도 누군가의 월급이 달린 문제에서는 속도도 중요하지 않을까. 민원을 직접적으로 들어본 사람으로서 여전히 그 답답함을 떠올리면 심장이 두근거린다.
*실제 인물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