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적 갓생러

첫 번째 이야기

by 해다니

각자 주변에 열심히 사는 사람 하나쯤은 보유하고 있지 않아? 와, 쟤는 뭘 위해 저렇게 열심히 살아가나 싶은 사람 말이야. 내 주변에는 나 빼고 다 그렇게 사는 거 같은 사람들만 있는 거 같아. 그래서 내가 두배로 한심하게 느껴지긴 해. 한 때 욜로? 그래 나는 욜로였다고 생각해. 한번 사는 인생. 그래, 하고 싶은 거 다 하다가 저세상 간다! 이런 느낌으로 살았는데, 생각보다 삶은 질기고도 길더라고. 내가 보낸 허송세월에는 여러 가지의 잘못된 점들이 있었어. 한 번 사는 인생!이라는 틀에 사로 잡혀서 달달구리한 디저트들을 마구잡이고 입에 넣었고,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들만 먹었어. 운동보다는 누워있는 삶이 더 행복했지.

결과는 너무나도 당연했어. 사실 나는 아무리 쪄도 55kg를 안 넘기는 사람인 줄 알았어. 그 몸에는 항상성 같은 게 있어서 그렇다고 하더라. 그런데 이게 한 번 넘어가잖아? 한 번에 확 찌더라.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는 거지. '오예 ~ 신난다! 자극적인 음식 알러빗!' 하고 매일 먹으면서 57kg이 되었을 때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어. 붓기겠지, 화장실 한 번 다녀오면 돌아오겠지. 하루 굶으면 되겠지. 그러더니 순식간에 10kg가 늘어나더라.

이제는 몸무게는 늘어나서 맞는 옷도 없고, 맞는 옷이 없다 보니 또 사야겠지? 옷을 사다 보면 지출이 늘겠지? 그런데 일은 안 하고 놀았더니 살 돈은 없네? 그럼 그지꼴로 하고 다녀야 하는 거야. 지금 내가 딱 그래. 거지꼴. 내 주변 사람들보다 꾸미는 걸 잘 못해. 그랬더니 이제는 취직도 잘 안되더라? 자기 관리도 취직에 관한 영역이었던 거지. 능력만 좋으면 될 거 같지? 아니야 안 그래.

내가 그래도 어디 가서 예쁘다는 소리 좀 듣고 살았어. 그래서 어느 정도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쉽게 쉽게 했던 것 같아. 그런데 지금은 살이 찌고 이목구비가 흐릿해지니까 1차 서류를 통과하더라도 면접에서 우수수수 가을 낙엽처럼 떨어지더라. 낙방의 실패가 이제는 아프지도 않고 익숙해져 지금은 합격하면 어떡하지? 걱정하고 있다니까. 이런 것도 적응이 되나 봐.

뭐 몸매만 망가지면 다행이게? 내가 자꾸만 내 자랑처럼 이야기할까 봐 자제하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내가 은근 근수저였거든 체지방 측정하고 그러면 타고난 근육수치가 높긴 했어. 그런데 지금은 뭐랄까, 움직이는 게 힘들어. 무거운 것도 들지 못하고, 전체적으로 몸에 힘이 없는 게 느껴져 활력, 체력, 열정 그런 것들 없어. 내 몸에 남아 있는 건 겨우 숨 쉬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수준인거지.


이 정도로 내가 태생부터 갓생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온몸으로 어필 중인데, 어필이 되었는지 모르겠네. 이쯤에서 당신이 궁금해할 나의 갓생러 A를 소개해줄게. 이 친구가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궁금해서 지금 이 긴 글을 읽고 있는 걸 테니까. 서론이 길었다.

내 인생을 바꿔준 사람의 등장은, 영화 <관상>에서 역대급 등장씬으로 꼽히는 '수양대군'처럼 거창하고 웅장하지도 않았고, 흔히 말하는 '구원자'의 등장처럼 하늘이 갈라지고, 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후광사이로, 두 명의 아기 천사들이 발가벗고 트럼펫을 불며 나타나지도 않았어. 이런 요란한 장면 하나 없이 스며들어왔지.

아주 평범하게 침투해서 나에게 은은하게 습관을 만들어줬어. A는 나의 친구이자, 조금은 무례한 친구라고 할 수 있어. 나에게 아낌없는 비난을 하는 친구거든. 대부분 친구사이에서도 지킬 건 지킨다고 하잖아. 없어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무례하기 짝이 없지. 처음에 '수동적 갓생러'를 적기 시작하면서, 내가 그동안 이 녀석에게 당한 '가스라이팅'에 대한 주제로 글을 쓰고 싶었으니까.

처음은 '물 마셔'였어. 인간을 구성하는 필수요소 중에 하나가 물이라는 것은 이제는 기본상식처럼 자리 잡았지만, 나는 알면서도 물은 맛이 없다고 생각해서 손이 가지 않았어. 하루에 종이컵으로 120ml의 물도 먹지 않으니 점점 집중력이 떨어졌고, 피로도가 금방 쌓이는 것을 느껴졌단 말이야. 가장 불편했던 건 어지럼증이었던 거 같아. 그런 나에게 친구는 어디서 나를 지켜보기라도 하는지 뜬금없이 문자를 보냈어.


[물 마셔 _ 12:10]

[물의 효능 : 친구에게 한 턱 쏨, 친구말 잘 들음, 피부가 좋아짐 _ 12:11]

[[속보] 물 안 마셔서 사망한 9n년생 실존_12:12]

[물 500ml 마셔 _ 12:13]


이건 백수가 되기 전부터의 이야기였어. 둘 다 회사에서 일을 할 시간이었는데, 매일같이 물 마시라고 보냈어. 내가 다른 사람 말은 잘 듣는 '자아가 없는 타입' 이어서 시키면 또 실행했지. 물 마시라는데 마셔야지. 자리에서 일어나서 탕비실에 있는 정수기까지 천근만근 움직여서 한 입을 딱 먹는데. 와- 역시 맛이 없는 거야. 물이 너무 맛이 없었단 말이야. 그래서 친구한테 또 연락했지.


[내가 먹어보려고 했는데, 맛이 없어.]

[누가 물을 맛으로 먹니, 원래 물은 맛이 없단다. 하지만 잘 먹으면 달아. 그냥 먹어.]


맹물을 못 마시면 '차'라도 마시라며 종류별 차를 선물해 주었지만, 차라고 다 물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즐겨 먹는 조금이라도 단 맛이 나는 차는 물 대용이 될 수 없었다.

그다음은 물 못 마시는 사람들을 위해 나왔다는 외국의 신비한 가루를 물에 타먹어 보았지만, 그걸 먹고 나면 탄산음료를 먹은 것처럼 입에서 단맛이 끊임없이 돌아다녔어. 사탕을 계속 입에 머금고 있는 느낌이랄까나. 그러다 보니 간식을 더 찾게 되는 거야. 내가 다녔던 회사 탕비실에 초콜릿과자가 정말 많았거든 건강 지키자고 시작해서 결국에는 탕비실에 있던 초콜릿, 과자, 빵으로 손이 가는 거야. 악숙환이었어. 젠장, 내가 마실만 한 건 '물'이 아니라고 하고, 그다음으로 찾은 게 혈당이 낮아지고 블라블라 뭐 몸에 좋아요.라고 광고하는 사과로 만든 액체였어. 식초 성분이었던 그것을 자주 먹는다는 건 또 위에 부담을 주는 거라더라고, 아따 물 한번 마시기 참 힘드네. 그 후로도 콤부차, 크리스털라이트, 애사비, 녹차, 옥수수수염차, 미네랄 음료수, 탄산수 뭐 "물 못 마시는 사람을 위해 나왔어요!" 하는 것들을 모두 먹어봤지만 오래가지 않았어. 그리고 이런 것들이 은근히도 아니고 대놓고 비쌌어.

나는 누가 시키지 않으면 절대 못하던 사람이었단 말이야. 학창 시절 '자기주도학습'시간. 줄여서 자습시간. 나는 그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을 몰랐어. 딱히 목표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애였거든 혼내어줄 누군가가 없다면 최선을 다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단 말이야. 친구의 '물 마셔' 말 한마디에 어떻게 서든 먹으려고 했는데, 끝끝내 찾은 가장 맛있는 게 마시는 방법이 그냥 '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가장 잘 맞는 것은 처음부터 커다란 텀블러에 얼음 가득 넣고 빨대로 먹는 물이었어. 내가 물머리에는 아니지만 미지근한 물은 약간 속이 느글거리는 맛이 난담 말이야. 그래서 더 맛이 없다고 느껴졌었는데 차가운 물로 바꾸고 나니까 술술 넘어갔어. 여기서의 포인트는 차가운 물보다는 '빨대'였지만, 이 마저도 나중에는 없이 잘 먹게 되었어. 액체를 마시는 행위자체가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야.


A가 나를 수동적 갓생러로 만든 첫 번째는 물 마시게 하기였어. 물을 먹고 다이내믹하게 활력, 체력, 열정이 생긴 건 아니고 그냥 머리가 어지럽던 것들이 좀 사라졌어. 그것도 아주 많이. 예전에는 땅에서 하는 멀미처럼 틈만 나면 아팠는데 물 마시면서 그런 게 사라지니까 정신이 말짱해진 거 같긴 하더라. 나한테 물 마시라고 했던 친구는 물 많이 마시는 친구냐고? 맞아. 이 친구는 물을 너무 사랑해. 아침에 눈 뜨자마자 물 500ml 원샷부터 때리는 사람이고, 여행 가서도 숙소에 돌아가기 전에 편의점 들려서 1.2L를 품에 안아야 마음이 놓이는 그런 아이. 그래서 별명이 히포야. 하마라고 하기엔 어감이 '히포'가 더 귀엽잖아. 실제로 하마가 물 많이 마시는 동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 글을 읽는 지금 물을 언제 먹었는지 생각해 보고 물 한번 마셔봐. 옆에서 물 마셔라 마셔라 100번을 말해도, sns에서 물의 효능. 이런 카드 뉴스 한 번에 오오 맞아 물 마셔야지. 하면서 먹는 사람들도 많잖아. 그러니 나 믿고 물 한 번 마셔봐. 생각보다 맛있을 거야.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면 또 놀러 와. 기다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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