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렌 예거와 현대 직장인인 나, 누가 더 자유로울까

<진격의 거인>과 자유의 역설에 대하여

by shotchuu

1.

이건 래퍼 빈지노(나의영원한우상..)의 <Break>라는 트랙의 도입 벌스 가사다. 이 노래가 발매되었을 당시 정신 사나운 고등학생이던 나는 별생각 없이 이 벌스를 매일 흥얼거리고 다녔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은 학교에 갇혀있었고 입시의 압박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어 다소 새장 안에 갇힌 새 같은 나날이었지만, 안전한 가이드라인과 규범 안에서 뛰어놀던 그날들은 그리 불행하진 않았다. 그저 얼마 후, 수능이라는 산을 넘고 성년이 되면 자연스럽게 손에 쥐어질 ‘자유’라는 걸 기대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을 뿐이다.

새장 안에 갇힌 새

막상 사회가 인정하는 성년이 되고 그 자유라는 걸 손에 쥐고 나자,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 조금 깨달았다. 똑바로 살지 않아도 혼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내가 술 마시다 수업을 안 가고 학점을 죽 쒀도 그 누구의 알 바도 아니라니… 오직 그 모든 것을 내가 혼자 알아서 책임져야 한다니. 그 시점, 내가 나를 제어하지 않으면 내 삶이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문득 소름이 돋았다. 홀로 상경한 스물, 가족도 아는 이도 없는 서울 땅. 손에 덜컥 주어진 자유는 너무나도 무겁고 무서웠다.


자유라는 것에 대해 한 차원 더 깊은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바야흐로 내 힘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다. 술도 옷도 화장품도 친구도 (심지어 아이돌도) 좋아하는 나는 늘 돈 쓰고 싶은 곳이 많았고, 적은 용돈과 아르바이트만으로 그걸 모두 충당하기는 늘 부족했다. 소비에 대한 결핍은 내 십 대와 이십 대 초반을 내내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미약한 경제력이나마 손에 쥐고 나자, 쓰고 싶은 곳에 돈을 쓰는 카타르시스를 처음으로 체감했다. 디자이너 브랜드 옷도 니치향수도 콘서트 티켓도 전부 내 돈으로 살 수 있다니!


하지만 내 힘으로 돈을 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깨어 있는 시간 중 대부분을 직장에서 쓰게 된다는 뜻이었다. 월화수목금 (어떨 땐 주말도) 9시부터 6시 (광고인이 정시퇴근하는 일은 많지 않다) 매일같이 돈 버는 일에 소중한 젊은 날의 대부분을 태우고 나면, 남은 시간을 쪼개어 좋아하는 일들을 해야 했다. 그나마도 바쁠 땐 기력이 너무 딸려 주말에 죽은 듯이 자야만 했다. 뼈 빠지게 돈 벌어 산 디자이너 브랜드 옷과 니치향수로 무장하고 어딜 갈 시간이 없는 거였다. 그때 불현듯 깨달았다.


아하, 나는 시간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를 등가교환한 거구나!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열심히 얘기하던 등가교환이라는 원리. 내가 속한 노동계급은 시간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돈 버는 걸 포기해야 하고, 경제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시간을 저당 잡혀야 하는 거라니. 한쪽에서의 자유가 다른 한쪽에서의 예속을 전제로 한다니. 빈지노 선배님이 말하던 ‘난 자유롭고 싶어 입고 싶은 옷 입고 싶어’가 내 삶에서는 근본적으로는 양립하기가 어려운 문장이었다니.


그렇게 생각하면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라는 것이 존재하긴 할까,라는 생각까지 도달했으나, 이내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사용자와의 근로계약을 통해 내 시간과 노동을 담보로 경제적 자유를 선택하는 것도, 그 반대로 소비를 포기하고 시간의 자유를 선택하는 것까지도 내게 주어진 자유였다. 너무 무서워.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은 존재다.”

자유가 선물이라기보다는, 인간 존재 그 자체의 형벌이자 고통이라는 얘기다.




2.


이런 깊생에 빠졌을 무렵, 내 머릿속에서 ‘자유’라는 키워드와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는 작품을 다시 한번 정주행 하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만화 <진격의 거인>이다.

진격의거인에 대해 묻는 친구, 나의 대답, 2021


*여기서부터는 만화 <진격의 거인>의 비평과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독자가 작품을 보았음을 전제로 하고 쓰고 있는 글이기 때문에… 혹시 진격의거인을 안 보셨는데 글을 재미있게 읽고 싶으시다면 진격의거인 줄거리 나무위키라도 읽고 오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아니면 혹시 이번 기회에 진격의 거인을 한번 봐보시는 건 어떨까요?


<진격의 거인>은 매우 충격적이고 잔혹한 연출에도 불구하고, 만화에 조금이라도 조예가 있는 나의 동년배라면 누구나 보았을 만한 작품이다. 나 역시 원작과 애니메이션을 가리지 않고 여러 번 보았으며, 오랜 기간 동안 원작 연재와 애니 n기 릴리즈와 완결까지 지켜본 작품이다. 최근에 최종장 극장판이 개봉하여 다시금 붐이 일고 있는 듯하다.


<진격의 거인>은 얼핏 보면, 거인이라는 미지의 적에 맞서 싸우는 인간의 사명을 주제로 한 디스토피아 장르처럼 보인다. 동료가 거인에 먹히는 걸 매일같이 보면서도 인류를 지키기 위해 나서는 조사병단의 장렬한 기개는 매우 숭고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이 전개되며 세계의 비밀이 밝혀지고 세계관이 확장될수록 작품의 주제 역시 한층 생각할 거리가 많아진다. 적은 동지가 되고,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고, 구원자는 학살자가 되기도 하며, 단순히 공포스러운 적에 맞서 싸우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보기는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 특이한 서사 구조의 중심에는 주인공 에렌 예거가 있다. 인류를 지키고 있던 벽이 부서지고 가족이 거인에게 잡아먹히는 장면을 눈앞에서 본 후 모든 거인을 다 구축하고 벽 안 인류를 지키겠다고 마음먹는, 전형적인 소년만화의 영웅 주인공… 인 줄 알았는데. 만화 중반부 세계의 비밀이 밝혀지며 에렌은 자신의 정체를 자각하게 된다. 사실 거인은 자신의 민족이었고, 피해자인 줄만 알았던 자신의 민족은 오랫동안 거인의 힘을 이용해 사람들을 핍박했으며, 그에 대한 벌로 벽 안에 갇혀 박해를 받고 있었다는 것. 이러한 세계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고민하던 에렌은, 사랑하는 친구들과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전 인류의 80%를 거인의 힘으로 밟아 학살하는 땅울림을 감행하게 된다.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그 사랑하는 친구들로 인해 저지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진격의 거인>은 소년만화의 영웅 주인공이 극 후반 메인 빌런이자 전 인류의 적으로 변모하는, 프로타고니스트가 안타고니스트로 전환되는 서사 구조다. 그리고, 여기서 이 에렌이 작품 내내 좇는 가치가 바로 ‘자유‘다.


최근에 마침 트위터에서 에렌의 3단변화 짤이 핫하길래 퍼왔다.

작품 내내 에렌은 정말 자유무새처럼 “자유롭고 싶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거인들을 모두 무찌르고 벽 밖의 세상에 나가면 존재할 줄 알았던 ‘자유’는 어디에도 없었고, 거인의 정체는 모습이 다른 우리들이었으며 벽 밖에는 우릴 노리는 적들이 있었을 뿐. 결국 에렌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벽 밖 인류를 모두 학살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자유를 박탈하는 선택을 한다. 사실 에렌이 선택했던 거인화, 복수, 땅울림 등은 모두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태생과 환경, 필연에 휘둘린 결과였을 뿐이다. 에렌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짓밟아야만 성립하는 역설에 도달하고(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논했듯 개인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성립한다) , 자신이 자유의지로 선택했다고 믿었던 것들조차 모두 정해진 길이었다는 깨달음을 얻을 뿐이다.


결국 <진격의 거인>의 주제의식은 ‘자유라는 환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좇는 인간의 비극’이라고 본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은 작가 이사야마 하지메가 인간은 정말 답이 없다는 염세주의에 절어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영웅주의 소년만화의 틀을 빌려, 인간이 존재하는 한 폭력과 학살은 피할 수 없고 자유라는 건 허상일 뿐이라는 말을 하고자 한 거다.


그래서 이 작품의 결말엔 도처에 절망뿐이다. 인간에게 일말의 희망의 씨앗조차 주지 않는다. 땅울림이 저지되고 인류의 80%가 학살된 후 에렌이 그렇게까지 해서 지킨 파라디 섬은 군국주의 국가로 변하고, 조사병단의 숭고함을 상징하던 ‘심장을 바쳐라’라는 구호는 군국주의 슬로건으로 사용되는 결말만 보아도. 에렌의 땅울림을 저지한 작품 최후의 프로타고니스트인 아르민은, 군국주의 파라디섬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데 온 힘을 쏟게 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던 것만 보아도. 폭력의 원죄를 의미하는 거인의 힘은 에렌과 함께 소멸했지만, 에필로그 맨 마지막에 거인의 힘이 부활하는 것까지 암시되는 것만 보아도.

진격의거인 파이널 애니가 공개됐을 때 함께 달리던 친구(노랑)과의 왓챠파티 채팅. 나는 만화 원작 완결을 봐서 결말을 알고 봤지만, 친구는 애니로 처음 결말을 봐서 반응이 격하다



(진격의 거인 얘기를 마무리하기 전에 사족 하나만 덧붙이고자 한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서 폭력 없이 살 수 없는 인간군상 자체를 비판하고자 했다고 생각하고, 그러기 위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구조를 채택한 것에는 매우 동의하지만… 이 작품을 오랫동안 따라다니고 있는 우익 논란까지 결부해 논하면 생각이 좀 복잡해진다. 어쨌든 영웅 서사의 표면적 구조를 차용하기 위해 조사병단을 통해 일본식 군국주의 문화를 미화했음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계속 영원한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다는 논리를 전개하는데, 이게 전쟁범죄 가해국에서 만든 작품이라 전쟁범죄 피해국 국민 입장에서는 영 꼬롬하게 다가온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 맥락이 약간 다른 얘기고, 이 얘기를 하려면 또 일장연설을 해야 해서 잠깐 짚고만 넘어감..)


그래도 이 장면은 지금봐도 눈물나요


3.

2023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새소년의 무대. 내 락페메이트 숨둥이(infp)는 새소년 보컬 황소윤이 <자유>를 부르려고 멘트를 하기 시직하면 자동으로 울기 시작한다.


지금까지는 오타쿠가 안경 척 올리면서 늘어놓았던 만화 얘기였고,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내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거인도 없고 땅울림도 일어나지 않지만 자유라는 개념은 존재하니까…


아까 이야기했던, 나는 경제적 자유와 시간적 자유 중 하나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것. 다시 생각해 보자. 이걸 선택할 자유가 정말 내게 주어진 자유인가? 왜 나에게는 시간을 저당 잡히고 노동할 것을 선택할 자유, 혹은 빈곤 속에서 시간의 풍요를 누릴 자유만이 주어진 것일까? 이걸 자유라고 볼 수 있을까?


현대의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 불리는 슬라보예 지젝은 최근 <자유>라는 제목의 신간을 냈다. (읽으려고 했는데 프로야구가 개막해 버리는 바람에 아직 못 읽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위험한 것은 마치 자유인 것처럼 누리는 비자유다."


개인의 권리를 제한받지 않을 것을 전제하는 자유주의. 시장경제 아래에서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하는 체계. 이게 정말 자유로운가? 자유롭도록 허락된 범위 내에서의 자유는 자유인가?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인가? 우리도 초반의 에렌처럼 어떤 벽 속에 갇혀 벽만 나가면 자유로워진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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