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력 12월 7일쯤, 많은 눈이 내려 땅이 쉬어 가는 때
밭 정리하기, 월동 작물 부직포로 덮어 주기, 동파 방지를 위해 수도 시설 점검하기
밭을 정리했다. 김장 이후에 드문드문 나가 남아 있던 양배추와 브로콜리, 콜리플라워를 얼기 전에 수확하고 콩깍지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널어두었던 서리태도 모두 까서 집에 가져왔다. 강추위에 수도관이 터지지 않도록 전체 수도를 잠그고 물도 다 빼내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밭을 온통 덮었던 초록이 사라지고 텅 빈자리만 남았다. 농한기가 시작되었다.
절기에 대해 얘기하는 날에는 이런저런 자료를 많이 찾아본다. 절기를 따라가며 이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내가 글을 쓰는 시기와 절기가 정확히 맞아떨어지지는 않으니 글을 쓰며 머리로 먼저 맞이하고, 나중에 몸으로 겪어내는 순간들이 많았다. 글을 쓰고 올리는 시간과 절기 시작의 차이가 크게는 일주일씩 나기도 했다. 예정대로였으면 "대설"도 일주일 차이가 날 뻔했는데 시기에 맞춰 쓰고 싶어 한 주 미뤘더니 이 글이 올라가는 날이 정확하게 대설의 시작이 되었다. 덕분에 대설의 채소, 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사진을 정리하고 있는데 첫눈이 내렸다. 차가운 눈이 땅 위에 쌓이면 농작물에 피해가 있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눈이 만든 공기층 덕에 외부의 찬 공기를 막고, 땅속 온도를 0°C 정도로 유지할 수 있게 돕는다. 또한 눈이 서서히 녹으면서 땅속 깊이 수분을 공급하기 때문에 "대설의 눈은 곡식의 보약이다"라는 말이 있다. 때문에 농부들은 대설 즈음에 눈이 오기를 바라며 기설제(祈雪祭)를 지내기도 했다는데 올해 신기하게도 대설쯤 첫눈이 온 것이다. "입춘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 "청명에 날이 개면 만사가 순조롭다."와 같은 말이 있을 만큼 선조들은 날씨를 보고 한 해 농사를 점치기도 했다. 대설에는 눈이 오면 내년 농사가 풍년이라는데 괜스레 벌써부터 내년 농사의 풍년을 기대하게 된다.
이제 모든 농사가 끝났기 때문에 절기에 맞춰 채소를 수확하고 이를 글로 옮기는 일도 끝에 다다랐다. 마지막으로 수확한 채소는 무였다. 대부분은 배추와 함께 수확해서 김장하는데 썼지만 아직 작아서 일부 남겨둔 무는 이후에 수확했다. 다시 무 씨앗을 심던 날로 돌아가면 8월 말,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두 번째 파종이었다. 여름은 심고 자라는 게 많아서 새로운 채소를 심을 자리가 모자라기도 한다. 1차로 빈 땅에 심고, 일주일 뒤 참외와 수박을 정리한 자리에 심었다. 무와 당근 같은 뿌리채소는 장소를 옮기면 다시 자리 잡고 자라는 게 어렵기 때문에 밭에 바로 씨앗을 뿌린다. 와이어가 묶여있는 말뚝을 하나씩 나눠 들고 밭의 끝과 끝에 섰다. 나란히 비뚤어지지 않게 붙잡고 말뚝을 박는다. 곧게 뻗은 와이어를 따라가며 구멍을 파서 한 구멍에 씨앗을 5개씩 심었다. 씨앗 봉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발아율이라는 게 적혀있다. 나중에는 한 구멍에 하나만 잘 키워야 크고 건강한 무로 자라나지만 씨앗을 심는다고 100% 발아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개를 심고 나중에 솎아준다.
심고 며칠 만에 싹이 올라왔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올라왔나 신기해했는데 원래 무의 발아기간이 4~7일로 짧은 편이라고 한다. 우리 밭에서도 약 4일 만에 올라왔으니 그중에서도 빠른 편이기는 하다. 씨앗부터 심어서 키울 때 가장 신기한 건 본잎의 모양과 다른 떡잎을 만날 때이다. 전에 공심채를 심었을 때 그 떡잎도 길쭉하게 뻗은 본잎의 모양과 너무 달라서 신기했는데 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뭔가 조금 낯익다. 가만히 들여다보며 생각하니 무순이잖아! 무의 잎이라고 생각하니 낯선데 무순이라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물론 우리가 무순으로 먹는 건 키를 쑥 키운 모습이지만 그 끝에 달린 잎의 모양이 너무나도 무순이다. 이제 생각하니 이름부터 "무의 순, 무순"인데 바로 알아차라지 못하다니. 1년이나 농사를 거들어 놓고도 아직 식탁에서의 모습과 흙에서의 모습을 매칭하는 게 어려울 때가 있다.
성장속도가 엄청 빠르다. 심은지 한 달이 채 안되었는데 제법 무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는 솎아줄 시기이다. 나중에 빈자리가 생기지 않도록 한 구멍에 여러 개의 씨앗을 심었지만 그대로 한 자리에서 여러 개의 무가 자라면 자리를 못 잡고 쓰러지기도 하고, 영양도 나뉘면서 여러 개의 못 자란 무로 자라난다. 그래서 하나의 건강한 개체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솎아주는 일이 필요하다. 전에는 뽑아냈는데 그러다 보니 남기려고 했던 개체의 뿌리가 따라 올라오는 경우가 있어서 칼로 잘라주기 시작했다. 일단 병들거나 약한 싹들을 먼저 잘라내고 남은 것들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크고 건강한지 비교한다. 제일 튼튼한 개체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잘라내고 나면 솎아주는 일이 끝난다. 이렇게 자른 어린 무청은 버리지 않고 김치를 만든다. 다른 쓰임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잘라내는 데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의 세계에서마저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니 뭔가 좀 씁쓸했던 걸까.
무는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얼마나 자랐는지 보러 가서 고개를 숙여 땅 가까이를 들여다보면 조금씩 땅 위로 내민 얼굴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땅 위로 올라온 부분이 햇빛을 받아 녹색으로 물든다.
김장의 날이 왔다. 가장 먼저 무와 배추를 수확한다. 이미 땅 위로 반 정도 올라와 있으니 무를 뽑는 건 어렵지 않았다. 뽑고 나면 그 자리에 동그란 구멍이 남는 것이 귀여워서 하나 뽑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입으로 "뽁!" 하는 소리를 내게 되었다. 게임이랑은 거리가 먼 사람이라 <모여봐요 동물의 숲>도 해본 적 없지만 사람들이 무언가 귀엽고 아기자기한 모습을 보면 "모동숲(모여봐요 동물의 숲의 줄임말) 같다" 얘기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은 이 게임을 하던 친구가 무를 사러 가야 한다고 했다. 게임은 전혀 모르지만 게임 안에서 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귀여운 무를 쭉 깔아 두고 보고 있으니 내가 현실 모동숲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중에 찾아보고 나서야 무가 "무주식" 또는 "무트코인"이라 불리는 투기의 상징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수확한 자리에서 바로 잎 부분을 잘라내고 무는 수돗가로 옮겼다. 무 수확을 마치고 밭을 둘러보는데 하얀 동그라미들이 모여 있어 이것마저 모동숲 같았다. (네, 그냥 귀여우면 붙이는 말입니다.) 무는 채 썰어서 배추김치 속을 만드는 데 썼다. 그리고 밭에 남겨 두었던 잎은 며칠 후 모두 주워다가 한쪽 벽에 걸어 말렸다. 시래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잘 말려둔 시래기로는 국을 끓여 먹기도 하고, 생선 밑에 깔아서 조림을 하기도 하고, 밥 위에 잔뜩 얹어 시래기 솥밥을 해먹기도 한다. 언젠가는 이렇게 말린 시래기가 너무 질겨서 먹기 힘들었던 해도 있었다. 부드러워질 때까지 몇 시간이고 푹 삶았는데 불에서 내리고도 온 집안을 가득 채운 구수한 냄새가 싫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은 항아리를 땅에 묻고 그 안에 겨우내 먹을 무와 배추를 저장해 뒀었다. 그렇게 저장해 두고 이따금씩 밭에 들러 무와 배추를 챙겨 오고는 했다. 한 겨울에 눈 쌓인 밭을 찾아가면 아무도 오가지 않아 깨끗하고 하얀 눈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그 눈을 뽀득뽀득 밟으며 묻어둔 항아리에서 배추와 무를 하나씩 챙겨 오던 때가 있었다. 작년 봄에 저온 창고가 생기면서 이제는 그 기억도 추억이 되었다. 인공지능이다 뭐다 엄청나게 빠르게 변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이렇게 작은 변화에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내가 어쩔 수 없는 아날로그 인간이라서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