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실체
시간이 참으로 많이 흘렀다.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고 살아가게 된 건지 이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떤 이유로 내가 삶에 열의를 가지게 된 건지, 오지도 않는 미래를 기대하게 된 건지, 사랑을 주고 싶다는 이유하나로 아이를 낳고 싶어 진 건지 사실은 잘 모르겠다.
구체적인 사건이 나를 바꾸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게 생기를 불어넣은 건 아주 사소하고 희미한 순간들이었다.
나의 엄마의 장례식장에 3일 내내 있어주며 도와준 고등학교 친구들의 어설픈 위로의 말과 행동들.
혼자 남은 내가 불안할까 머리를 감고 오겠다는 얘기까지 하며 '돌아옴'에 대해 강조하던 지영이.
텅 빈 집에 혼자 있기 싫다는 나의 어리광에 좁은 내 자취방에서 하루를 보낸 유진이와 수민언니.
마지막 재판에 함께 가서 말없이 옆자리를 지켜준 지은언니.
매일매일 불편하게 꼬여있는 나의 드라이기 선을 풀어주던 희.
내 심장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나의 고양이들.
그게 다였다. 괴로울 때 곁에 있던 이들의 다정함. 아주 예전엔 그런 순간들이 현실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착각을 했던 것 같다. 이 모든 건 문제해결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긴 하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욱 괴로웠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내가 기억하는 건 문제 해결과정 따위가 아니라 이런 순간들 뿐이었다. 나는 사랑받았고, 사랑받고 싶어서 살고 싶어진 것뿐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나의 엄마, 그녀와 있었던 순간들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특성상 충격적이거나 트라우마와 관련된 기억이 더 많이 남아있긴 했지만 그 속에서도 나는 몇 가지 순간을 찾아냈다.
나의 어린이집은 도시락을 싸와야 했다. 두 아이를 혼자 키우며 일을 했던 그녀는 매일매일 새벽부터 일어나 도시락을 싸서 나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일터로 나갔다. 그날은 어떤 이유에서 인지 그녀가 일어나지 않았다. '도시락은?'이라는 말에 그녀가 말했다. '돈도, 쌀도 없어서 오늘은 싸줄 수 없어.' 나는 별다른 말대꾸를 하지 않고 빈손으로 어린이집에 갔다. 도시락을 가져오지 않은 내게 어린이집 선생님은 왜 오늘 도시락을 가져오지 않았는지 물었는데, 난 덤덤히 가난해서 도시락을 싸 올 수 없었다는 대답을 했다. 그 순간, 어린이집 문이 열리더니 그녀가 나타났다. 손에는 도시락통을 들고 있었고 그 여름날 얼마나 달렸는지 땀범벅이었다. 그녀는 내게 도시락통을 쥐여주며 말했다.
'엄마가 아무리 가난하고 돈 없어도 너 도시락은 꼭 싸줄 거야. 늦어서 미안해.'
그리고 그녀는 약속을 지켰다.
그녀가 나를 사랑했는지 미워했는지 모르겠고 헷갈릴 때면 나는 이 기억을 꺼내보려 한다. 이 기억은 나에게 있어서 사랑의 증명이 되어줄 것이다. 이제는 그녀가 날 사랑했는지 안 했는지 이분법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으려 한다. 그녀의 다정한 순간들을 모으고 모아 그녀의 마음을 간직할 것이다. 매일매일 사랑이 무엇이냐고, 어디 있냐고, 존재하기는 하는 것이냐고 물으며 내가 찾던 사랑의 실체는 이토록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마음이 아니라, 행위. 상대를 위한 다정한 행위만이 사랑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들이 사람을 살아가게 했다.
최근에는 아끼는 사람들과 즐겁고 다정한 기억을 남기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이 누군가의 동력이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벅차고, 언젠가 다가올지 모르는 이별을 떠올리면 얼얼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별이 두려운 것 역시도 사랑 때문이니까. 사랑한 사람만이 겪을 수 있는 아픔이니까. 두려워하고 싶지도 않다.
그녀가 많이 그립다. 일전에는 그녀에 대한 기억을 방어적으로 떠올리지 않고 꺼내지 않으려 애썼는데 더 이상은 아니다.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거리낌 없이 꺼내며 충분히 슬퍼하기도 하고 어쩔 땐 '진짜 웃기는 사람이었어.'라며 웃음이 나기도 한다. 어쩌면 나는 이제야 이별하는 방법을 배운 것 같다.
안녕,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