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사랑한 사람들(1)
상처가 성장시킨다는 거짓말
상처가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말을 믿지 않은지는 오래됐다.
7살, 습기 가득한 사우나 목욕탕에서 때를 밀고 있는 그녀의 등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엄마, 냉탕에 가도 돼?' 온탕의 온도는 내게 너무 뜨거워서 숨쉬는 것 조차 버거웠지만, 숨이 차오를 만큼 참다가 말하곤 했다. 그러면 그녀는 주변을 살피다가 '바구니로 가리고 가.'라고 대답했다. 나는 후다닥 가장 큰 바구니로 나의 등부터 허벅지까지 이어지는 멍자국을 자리고 냉탕으로 달려가 첨벙 뛰어들었다.
그녀는 뜨거운 물에 있으면 멍이 금방 사라진다며 멍이 생긴 다음날엔 사우나로 데려가곤 했는데, 사실 아니었다. 실제로는 차가운 물이 몸의 멍을 더 빨리 없애게 만들어주는 게 진실이었다(어쩌면 그녀는 이 진실을 여전히 모른 채 떠났을지도 모른다).
냉탕에서 물장구소리가 길어지면 그녀는 어김없이 다가와 온탕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럼 바구니를 들고 투덜거리며 온탕으로 가 숨이 차게 뜨거운 온도를 견뎌야 했다. 여전히 목욕탕을 떠올리면 그녀의 뒷모습이 떠올라 심장이 쿵- 했다가, 냉탕에서 만난 친구들과 물장구를 치며 웃던 날이 떠올라 웃음이 나기도 하는, 나에게 목욕탕은 그런 곳이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난 7살에 머물러 있다.
생각해 보면 상처라는 건 단 한 번도 나를 성장시켰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녀가 떠난 뒤 내가 가장 괴로웠던 건 나아갈 수 없다는 거였다. 책을 펼쳐도 글자에 집중할 수 없었고, 웃음이 나면 웃음에 집중할 수 없었으며, 새로운 글을 쓰다 보면 주인공들을 전부 불행의 구렁텅이로 넣어버리곤 했다. 그 이유에는 여러 무의식이 이유로 존재했는데 주로 죄책감과 자책, 수차례의 자기 검열 때문이었다.
'내가 이래도 되나.' '내가 그때 이랬더라면...'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나?' '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가.' '정말 더이상 방법이 없었나.'
여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래서인지 무언가에 집중한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런 생각에 빠져있고 싶지는 않았다. 책임져야 할 생명체가 있었으니까. 그런 나에게 생각할 시간이 없는 주방일이 꽤 많은 도움이 되었다. 끊임없이 손을 써서 무언가를 만들고, 청소하는 노동은 잡생각들이 사라지게 만들어줬다. 덕분에 당시엔 돈을 벌 수 있었고 나의 고양이를 양육하는데 문제는 없었지만 나의 정신은 후퇴했다. 무언가를 배우거나 창작하지 않았고 기술을 단련하지도 않았다. 아니, 못했다. 이런 성장을 하는 것 자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보일까 봐 두려웠으니까.
가장 추운 겨울이 지나갈 때쯤, 친오빠가 의가사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병이었지만, 부대에서는 집안의 사정과 그의 상태를 고려해 주었고, 몇 가지 단계를 거쳐 그가 제대하게 되었다. 어느 점쟁이는 그가 그녀의 망망대해를 헤쳐나가게 해 줄 유일한 존재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만큼 두 사람의 사이는 긴밀하고 두터웠다. 그녀가 있는 집에서 그와 나는 대화라는 걸 할 필요가 없었는데, 그녀가 없는 집에서는 그와 대화를 해야 하는 일이 꽤 많이 필요했다. 청소, 빨래, 설거지, 등 평생을 같이 살았지만 전혀 맞춰본 적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꽤나 괜찮아 보였다. 금방 PC방 알바자리를 구했고, 집에 돌아와서는 게임을 했다. 그녀의 상속자는 그였는데, 그녀의 보험금으로 빚들을 조금씩 갚아가기도 했다. 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일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일상을 산다는 건 내게 꽤 위로가 되는 일이었다.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한 사람도 일상을 지켜낸다는 것은 나를 괴롭게 만든 죄책감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도 살아가는구나. 나도 살아야겠다. 라는 생각을 들게 해 주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주인공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하지도 않았다. 나름대로 유쾌한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내가 조금 나아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내가 한발 나아가고 있을 때,
그는 열렬히 후퇴하는 중이었다.
나중에 그가 내게 말한 것들 중 진실이라는 게 단 하나도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난 중얼거렸다.
'내가 뭐랬어. 상처 같은 게 사람을 성장시킬 리 없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