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지를 스스로 산 적이 있던가?
이별이 다가오는 법
사실 그녀가 떠난 날, 나는 굳이 말하자면 슬프지 않았다.
이런 나를 보며,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나는 감정이 없는 걸까? 나는 그녀를 그저 미워했던 걸까?
라는 등의 생각이 뻗어나가다 자기혐오까지 이어지게 됐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슬픔이라는 건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자유롭게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며칠 새 나는 경찰서를 오고 가며 진술해야 했고, 장례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시키는 등, 당장 눈앞에 처리해야 할 것들이 더 많았을 뿐이었다.
담당서에서는 나에게 범죄피해자지원센터 담당자를 소개해주었다.
담당자(뭐라고 불리는 사람인지는 모르겠다)는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여러 제도에 대해 설명해 주다가 가방에서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캐슬린 오하라)'이라는 책을 건네주었다.
그때 나는 아직 슬픔이라는 게 어떤 건지도 모르던 상태였는데 이토록 직관적이고 명확한 문장을 보니 더욱더 내 상황이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책의 쓸모를 다하기 위해 읽기는 했다. 내용을 단조롭게 설명해 보자면, 필자(캐슬린 오하라)의 대학에 간 아들이 실종 후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그녀만의 방식으로 슬픔을 극복해 가는 이야기였다.
확실한 건 당시 나에게 도움 되는 책이 아니었다. 이별을 인지하지도 못한 내가 슬픔을 극복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별은 아주 사소하고 별거 없는 순간에 다가왔다.
"휴지를 스스로 산 적이 있던가?"
그녀가 사둔 생필품과 음식이 다 쓰거나 썩어가서 동네 슈퍼에 방문해야 했을 때 든 생각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니, 없네.라고 자문 자답했다.
나한테 휴지란, 집안 베란다에 가득 쌓여있는 무언가이자, 언제나 집에 있는 것이었다.
"이게 오백 원 더 싸네, 그런데 더 얇네. 원래 쓰던 건 뭐였지? 이게 제일 유명한 거 아닌가? 근데 좀 비싸네."
중얼중얼거리면서 결제한 휴지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눈물이 쏟아지거나 엉엉 울진 않았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한테 엉엉 운다는 건 뭐랄까 사랑받고 싶거나 도움을 받고 싶을 때 가장 가까운 사람 앞에서 나오는 것 같다.
그냥 텅 빈 집에 들어가서 눈을 벅벅 닦으며 휴지를 정리하는 게 다였다.
이별은 이렇게 다가왔다. 김치를 직접 살 때, 다시다를 살 때, 텅 빈 쌀통을 채울 때, 화장실 청소를 할 때.
내가 매일매일 울지 않아서, 가끔은 크게 웃어서, 우울한 표정이 아니라서, 농담을 해서, 일상을 유지해서.
그녀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금 또 그런 말을 듣는다면 나보다 그녀를 미워해본 적 없으면서 어떻게 내 사랑을 의심할 수 있어?
라고 대답을 할 수 있지만 그때의 나는 혼란스러웠다.
미워하는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과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날 꿈에 잘 나오지 않던 그녀가 나왔다. 그녀가 물었고, 나는 대답했다.
너, 날 사랑하긴 한 거야?
난 당신을 세상에서 가장 미워했어. 보고 싶어.
다음날 눈을 떴을 땐,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