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랑 Nov 15. 2024

그녀가 사랑한 사람들 (2)

상처가 성장시킨다는 거짓말

비가 오는 날 이사하면 잘 산다던가, 상처를 받으면 단단해진다던가, 큰일을 겪으면 액땜을 했다던가.


사실 이런 말들은 사람들이 부정적 현실이나 직면한 상황을 회피하고 싶어서 만들어낸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주로 누군가에게 위로하기 위해 이런 말들을 숨 쉬듯 사용하곤 한다. 실제로 내게 이런 말들이 도움이 되거나 위로가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난 문제를 해결하거나 위로하기 위해서는 상황과 현실 인지를 제대로 하는 게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일은 잊고 그저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말은 여전히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너무 가혹하다.


이런 회피를 근거로 한 방식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에게는 익숙한 방식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모든 감정과 상황 그리고 현실을 외면하고 살면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품에 다니던 상태였다.


이를테면,

엄마의 보험금을 생활비로 쓰고 있었으면서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나에게 거짓말을 1년 동안 해왔다던가,

대출금을 갚는 데 사용해야 했던 돈을 게임머니로 탕진했다던가,

제대후 해야 했던 대학 복학을 학교의 시스템 때문이라고 해명하며 1년 넘게 하지 않았다던가.


그가 품고 있던 폭탄은 결국 내 앞에서 터지고야 말았다. 처음엔 미친 게 아닌지 제정신인지부터 파악하려 했지만 그는 그저 '나도 이렇게 될 줄 랐어.'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난 어떻게 그가 이럴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그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믿었기에 이 상황을 보았을 때 느낄 배신감을 내가 대신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그저 나와 다른 방식으로 멈춰있는 사람 중 한명일뿐이었다. 그가 말하길, 그녀가 떠나고 왜,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랐단다.


그는 사실 이루고 싶은 웹툰작가의 꿈도 그녀의 부탁대로 포기했고, 대학교 입학부터 수강신청, 군입대까지. 그녀의  지시대로 살아왔기에 스스로 무언가를 주도적으로 해본 적이 없는 온실 속 화초 같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요구에 엇나가다가 튕겨나가기까지 한 나와는 다르게 그는 그녀의 말에 불만 한번 제시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따르는 그런 사람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오랜 시간 곪은 상처들로 인해 이미 예전부터 성장이 멈춰있는 상태였고, 그녀의 부재는 그의 정체된 상태가 낱낱이 밝혀지게 만든 것뿐이었다.


그가 내게 말했다. "너는 아니겠지만, 난 슬퍼서, 힘들어서 그랬어."


그가 내게 상처 주는 게 목적이었다면 이 말은 실제로 내게 타격이 있었지만 사실 거짓말이라는 걸 안다. 그는 오랜 시간 정체되어 있던 자신의 문제를 그녀가 떠났다는 걸 핑계로 삼은 것뿐이다. 이미 말했듯이 회피는 그에게 익숙한 방식이었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그가 너무 미웠지만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나에게 가족은 그뿐이었으니까. 심지어는 조금 안타깝기도 했다. 몇 시간 동안 그와 모든 감정을 쏟아내며 싸웠다. 너무나 큰 배신감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다시는 보지 않거나 인연을 끊을 수도 없다는 걸 알았다.


그날밤 그에게 냉장고 청소를 하자고 했다.


우리 집 냉장고는 그녀가 생전에 채워둔 음식들로 가득한 상태였는데, 정작 살아있는 우리는 그게 무엇이며 어디에 쓸 수 있는지,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모르는 게 대부분이었고 우리가 산 음식이 넣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별 말없이 냉장고 청소에 동참했다. 하나둘씩 안이 비워져 갔다. 있는지도 몰랐던 음식들이 썩어있었고 너무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청소를 마쳤을 때, 냉장고 안에 있는 건 우리가 사 먹은 배달음식들 몇 개와 얼려둔 냉동밥 몇 개가 전부였다. 우리가 채운 건 이게 다였다. 그는 버려야 할 쓰레기들을 가득 안고 분리수거를 하러 나갔고, 나는 혼자 남아 텅 빈 냉장고를 보다 문을 닫았다.


며칠 뒤 그는 패스트푸드점 알바를 구했고, 얼마뒤 복학을 했으며, 수강신청부터 졸업을 스스로 해나갔고 현재는 일자리를 구해 2년간 재직 중이다.


상처 따위는 그를 성장시키지 못했지만, 그녀의 부재는 그가 스스로 나아가게 만들었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이전 03화 그녀가 사랑한 사람들(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