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남자친구에게
그녀를 사랑한 사람들 (2)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은 어딘지 조금 다르다. 사랑받고 있는 사람은 누군가의 견고한 지지를 받고 있는 것처럼 자신감 있고, 타인에게는 너그럽고 다정해지곤 한다. 그녀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그녀에게는 2년 정도 교제한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는 아내와 오래전 사별했고, 자식은 없는 상태로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중후한 느낌의 남자였다. 관계가 진전되면서 두 사람이 나눠 읽는 책들은 집에 쌓여갔고, 내방 베란다에서는 담뱃갑이 발견되곤 했다.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고 했던가. 입술생기에는 관심이 없던 그녀가 내 립스틱을 쓰기 시작했고, 내 부친이 골초라서 담배냄새를 싫어했던 그녀가 그가 피는 담배에는 관대해졌다. 그는 담배를 하루에 단 세 번 피는데 아침에 한번, 점심에 직원들과 대화하면서 한번, 퇴근 후 집 앞에서 한 번이 유일하다고 했다. 그녀가 그토록 싫어했던 담배냄새마저 사랑스러워진다는 것이야 말로 사랑의 힘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에 빠진 그녀는 말과 웃음이 많아지는 것에 멈추는 게 아니라 어느 날 종교마저 생겼다. 자신이 자식을 무사히 키워내고 그를 만나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마리아'라는 세례명까지 받더니, 주말이 되면 교회 내 비행청소년 센터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비행청소년에게 밥을 차려주고 하루종일 수다를 나누다가 저녁이 될 때쯤 돌아오곤 했는데, 돌아와서는 나에게 이런저런 말을 하고 싶어 하곤 했다. 내용은 주로 그녀가 비행청소년 아이들에게 딸(필자)이 속을 썩인 이야기를 잔뜩 하면, 아이들은 자기보다 낫다며 자신이 얼마나 큰 사고를 쳤는지 무용담을 늘어놓았는데 그 이야기들이 그녀에게는 이상한 위로가 된 모양이었다. 그러곤 나에게 하는 말이 '그래도 걔네들보단 네가 양반이긴 했지. 나도 너한테 그 정도로 나쁘게 굴진 않았잖아?'였는데, 이 말은 내 기분을 좋게 하기는커녕 나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비행청소년 아이들과 나를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하고 있는 그녀의 속내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물론,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들으면서 그녀는 자신이 꽤 괜찮은 부모였다고 스스로 위로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거 아닌가? 그녀가 나와 감정의 응어리를 풀고 싶어서 건넨 말들은 관계를 더 어긋나게 만들곤 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그녀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그녀가 나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나와 모든 연락을 끊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 먼저 용기를 낸 건 그녀였다. 그녀는 늦은 밤 내 자취방에 찾아와 자정까지 나를 기다렸는데, 나는 빌라 앞에 세워진 그녀의 차가 사라질 때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의 차가 사라지고 들어간 집 냉장고에는 반찬들이 채워져 있었지만 고맙다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 연락하지 않았고, 나는 그게 마지막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
그녀의 빈소에는 마리아라는 세례명이 쓰인 위패가 올라갔다. 내가 알고 있는 그녀의 원래 이름과 그녀가 두 번째로 얻은 이름이 함께 있었다. 그녀의 장례식장에는 원래의 이름보다 두 번째 이름 마리아와 연관된 사람들이 더 많이 왔다. 그들에게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주말마다 봉사를 하면서 비행청소년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 이혼 후 꿋꿋이 아이 두 명을 키워내고 하나님을 믿으며 믿음과 사랑, 봉사를 실천하는 사람? 좌우지간 내가 아는 그녀랑은 다를 것이다.
나는 상주석에 앉아 그녀를 사랑한 남자를 찾았다. 분명히 그에게도 문자를 보냈으니까.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나는 그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어딘지 모를 섭섭함을 느껴 장례가 끝나고 그에게 연락을 할지 말지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그에게서 먼저 문자가 왔다.
그는 장례식장에서 멋대로 상주석을 차지한 나의 부친을 보고 자신이 감히 가도 되는지 고민하다가 장례식장 앞을 맴돌다 돌아갔다고 했다. 내내 마음에 걸려 조심스럽게 연락하게 되었다며 괜찮다면 그녀가 있는 수목장에 데려다줄 수 있는지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러더니, 그녀가 떠난 날 자신과 약속이 있었지만 자신에게 갑자기 일이 생겨 못 만나게 되었고, 그녀는 알바 대타를 뛰러 간다고 했었는데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난 게 전부 자신 때문인 건 아닌지, 어쩌다 떠나게 된 건지도 물었다.
나는 섣불리 그 문자에 답장하기 어려웠다. 오래전 아내와 사별한 남자가 또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게 안타까워서였다. 나는 그가 진실을 알길 바라는지 모르길 바라는지 혼란스러웠다. 그저 그녀를 사랑한 사람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했고 며칠 동안 고민하다 답장했다.
'아저씨가 약속을 취소했기 때문이 아니에요. 나도 전날에 그녀가 나를 찾아왔지만 만나지 않아요. 우리 모두가 막을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났을 뿐이에요.'
나는 그녀를 사랑한 사람들이 힘들지 않기를, 다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건 사랑할수록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기에, 그녀를 사랑한 사람들이 힘들기를 바라기도 하는 내 이중적인 마음을 나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