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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 Nov 20. 2024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누군가에겐 사랑스럽다는 진실

그녀를 사랑한 사람들 (1)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누군가에겐 너무나 사랑스러운 사람일 때가 있다. 드라마나 영화 악당도 살아있다는 사랑받은 기억이 있어 삶을 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녀 역시도 그랬다.


어쩔 땐, 다른 사람에겐 사랑스러울 수 있으면서 나에겐 이렇게 많은 상처를 준 그녀가 더욱 미워지곤 한다. 그녀는 나의 할머니, 즉 그녀의 엄마. 귀순에게는 특히 더 아프고 애틋한 손가락이었다.


그녀는 오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언니들과 동생들 사이에서 도시락에 계란과 소시지 한번 담아본 적이 없었고, 공부를 잘해서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아 유일하게 서울 4년제 대학에 붙었지만 집안 사정으로 대학을 포기했고, 하나뿐인 남동생을 공부시켜 대학에 보낸 뒤 등록금까지 대주었다. 또한 글과 그림에 재능이 있었던 그녀는 만화가로 데뷔하여 상도 받고 출판까지 해냈지만, 출판사의 배신과 갑작스럽게 밀어붙여진 결혼으로 꿈에 몰입하지 못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귀순이 밀어붙인 결혼 상대는 거짓말쟁이에 책임감이 없는 남자였고, 결혼 10년 차에 오 남매 중 유일하게 이혼한 자식이 되었다. 이렇게 기구한 그녀의 삶은 귀순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녀가 떠난 지 1년이 되었을 때, 그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귀순이 이모들과 함께 집에 온 적 있다. 귀순의 품에는 그녀가 20대에 출판한 만화책 1-4권과 함께 있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묻자, 그녀와 가장 가까웠던 친구가 운영하는 치과 책장에 꽂혀있던 책을 그냥 가져왔단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웃음이 나왔다. 이건 절도라며 어떻게 남의 사업장에 있던 책을 말없이 가져올 있냐고 몇 마디 했지만 소용없었다. 귀순은 치매가 시작되면서 어린아이로 돌아갔으니까. 오히려 내 딸의 책을 치과에서 찾아냈다는 게 운명적인 상황으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이 책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여러 고민을 했다. 모르는 척 가지고 있을까. 아니면 편지와 함께 택배로 부칠까. 결국 나는 귀순이 훔쳐온 만화책을 돌려주러 치과로 향했다. 품에는 박카스 한 박스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 혼자 이런저런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의 친구를 직접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그녀에 대한 공감대를 쌓으려고 할까 두려움이 앞서긴 했다. 그래서 치과 접수대에 멈춰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준비한 말을 쏟아냈다.


"저는 검진하러 온건 아니고요.  얼마 전에 저희 할머니가 여기서 치료받고 만화책을 훔쳐와서 다시 돌려드리러 왔어요. 죄송해요. 치매가 있어서 간혹 실수하십니다. 이거, 마시세요."


간호사에게 말을 쏟아내고 박카스 박스를 들이밀며 도망치듯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엘리베이터가 4층을 지나 5층에 도착할 때쯤, 중년의 남자가 날 붙잡았다. 그녀의 친구였다. 그는 잠시 기다렸다 함께 밥 한 끼를 먹지 않겠냐고 물었다.


난 거절했다. 그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릴 벗어났다. 그리고 그와 멀어지면서 중얼거렸다.


"당신들과 내가 기억하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에요. 같은 이름, 같은 얼굴을 가진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요."


분명 내가 기억하는 그녀와 그들이 기억하는 여자는 다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느끼는 그리움이 나의 것과 동일할 것이라 착각하면서 자꾸만 교집합을 찾으려 할 것이라는 걸 안다. 내가 그녀를 떠올릴 때의 감정은 하나가 아니다. 분노, 동정, 애증 그 이상의 무언가다.


집에 돌아와 돌려준 만화책을 구매하기 위해 검색을 시작했다. 그녀의 책을 구매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더 이상 누군가 구매하지도, 읽지도 않아 떠도는 만화책을 중고로 구매했고 책장에 꽂아두었다. 나 혼자 이 책을 펼치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지만 언젠가 내게 아이가 생긴다면 너의 할머니가 쓰고 그린 만화책이라는 말을 해줘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나의 아이는 나와는 달리 얼굴도 본 적 없는 그녀사랑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나는 그 아이를 위해 만화책을 펼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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