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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진 May 21. 2019

할머니가 참외씨를 도려내는 것이


주말 내 배앓이를 했다.

나에겐 너무 흔한 일, 배탈과 장염이 워낙에 상인지라 이제 웬만한 배앓이는 그냥 아침 문안 인사 같은 당연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럴 때마다 병원에서는 밀가루와 찬 음식을 피하라고 조언해 주었지만, 그런 주의 사항즘이야 "오늘도 힘내자, 파이팅!'정도의 정형화된 인사로 흘려 넘긴 지 오래. 

도 아이스크림도 면도 과일도 포기할 수 없으니, 참느라 괴로우느니 차라리 먹고 아프고를 반복하겠다는 이상한 자기 합리화를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번 주말의 배앓이는 여느 때보다 제법 심해서, 며칠간 항생제를 먹기 위한 아주 약간의  죽만을 섭취하며 내가 나를 간병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나마 죽을 먹는 중에도 배가 아파와 거의 좀비와 같은 상태로 방 화장실 방 화장실을  반복하다가, 문득 정신이 좀 났을 때 생각난 것이 그저께 사둔 냉장고 속 참외 한 봉지였다.

빨리 먹지 않으면 상해 버릴텐데...

그런데 할머니가 참외는 배아플 때 먹으면 안된다고 했는데...


나는 어릴 적부터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내가 같이 살았다기보다 우리 부모님이 모시고 산 셈이지만....)

천성이 조용하고 부끄럼이 많던 할머니는 평생 식욕이란 게 거의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가끔 나와 나란히 앉아 일일드라마를 볼 적에는 내가 배고프지 않은지 수시로 고 또 물었다.

그러다 과일이나 좀 깎아달라 청하면,

참외를 내주실 때는 언제나 씨 부분을 다 도려 내고서 주셨는데

"제일 맛있는 부분을 다 빼면 어떡해."

하고 투덜거

"참외씨 먹으면 배탈 나."

하시며 단호한 표정을 지으셨다.


수박을 먹을 때는 이쑤시개를 들고  씨를 하나씩 빼빨간색만 남은 수박을 내 앞에 슬쩍 놓아주고

귤을 먹을 때는  옆에 앉아 흰색 끈을 하나씩 떼어 주었다.


예쁘고 좋은 것만 먹으라고, 주름 진 손으로 분주하게 내 옆을 지켜주시곤 했다.


이제와 생각하니 그게 다 너무 사랑이었어서

나를 그토록 껴준 것이 너무 고마워서


할머니가 없는 나 혼자의 방에서

나는 나에게

손질하기 귀찮아 최대한 대충대충 먹을 수만 있게 만든 것들만 먹여서

배가 자주 아프게 된 건 아닐까 싶어 지기도 한다.


참외씨가 배탈이 난다는 게 진짜인지 아닌지 과학적으로 알아본 적도 없이

그저 할머니가 말하니 그런 건가 했었는데

할머니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던 걸까?

참외씨를 먹고 크게 배앓이를 한 적이 있나,

아님 할머니의 엄마도 할머니도 그렇게 씨를 빼준 걸까. 


더이상 할머니에게 물어볼 수는 없지만,

할머니도 부디 그렇게 배 아프지 말라 참외씨를 빼주던 사람에게 배운 거라면 좋겠다.

할머니도 그토록 아끼고 귀여워해줬던 누군가가 있었던 것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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