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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진 Jul 01. 2019

내게 연락할 번호 하나가 없는 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매 학년 학급 임원을 놓쳐 본 적이 없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지, 내가 해오던 거니까 하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일종의 학교 생활의 루틴처럼 반장이 되어야겠다 생각했고, 반장이 되었고, 반장을 했었다.

맡은 바 임무에 따라 학급 친구들과 두루두루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딱히 누구와 친하냐고 묻는다면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사이가 나쁜 친구는 없었지만, 사이가 특별한 친구도 없었다. 그렇다고 태생적으로 인기가 많아 사람이 따르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존재감이 크게 부각되는 편도 아니었다.

그래서 수학여행에서  두 명씩 버스를 탈 때, 점심시간에 함께 도시락을 먹을 때, 체육 시간에 짝지어 체조를 할 때, 난감해진 적도 자주였다.

1순위로 나와 짝을 지을 친구가 없었다. 나는 늘 10명을 뽑으면 들어가지만 1명을 뽑으라면 속하지 않는 그런, 친하지만 가깝지는 않은 어딘가에 있었다.


서른 중반이 되어서 문득 (비단 이제 와서 그런 건 아니고 늘 그래 왔지만...)

갑작스레 만나자 할 사람을 떠올리려고 하니, 쉽게 떠오르는 이름이 없다.

밤 시간에 약속을 잡기 힘든 아이와 가정이 있는 친구를 제외하고, 일 적으로만 엮인 관계들을 제외하고, 지방에 사는 이들을 제외하고, 요 근래 어쩐지 머쓱해진 관계를 제외하고 나니

내가 이렇게 사람이 없는 사람이었나, 세삼스러운 고찰에 들어가게 된다.


만날 때마다 혼나는 기분이 드는 친구가 있었다. 분명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싸우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온화하고 지나칠 정도로 안정된 정서를 가진 친구였다. 하지만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어쩐지 나를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글을 쓰는 일이 너무 힘들어"하면 "글을 쓸 수 있는 현재가 얼마나 감사한지 알아야 해. 내 경우엔 말이야..."

"누구누구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면 "그건 네가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했기 때문 아닐까? 나의 경우엔 말이야..."

우리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대화를 하다 보면 나는 늘 어리석고 부족한 사람이 되어 있었고, 친구는 언제나 자신의 경험을 위인전처럼 말하며 나를 타일렀다(지만 나는 혼나는 느낌이었다) 조금도 이해받지 못하고 분석되고 판단되었다.

긍정이라는 커다란 벽 앞에, 나는 말을 내뱉을수록 그저 생각이 짧고 경거망동하는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나의 진심이 나의 약점이 되어 돌아오는 기분.

그래,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친구는 그만 만나야 겠어, 그렇게 생각하고 얼마 후


또 다른 친구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되었다.

"넌 내 말을 무시하는 거 같아."

친구는 내가 자신이 하는 말들에 대해 인정하기보다 비판하고 무시하듯 평가한다고 말해 섭섭하다는 심정을 털어 놓았다.


내가 비난했던 그 과오가 나의 과오였다.

결국 내가 미워했던 타인의 어떤 면은 내가 미워했던 나의 어떤 면모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성인이 되고 나서 주변에 사람이 많았던 적이 별로 없다.

다지 수더분한 성격이 되지 못했고, 앞에 나서서 뭔가 하는 버릇도 고등학교 이후로 질려 버렸다. 살아가는 데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포만감 없이 얕고 넓은 관계보다는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좁고 깊은 관계를 추구하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나는 관계에 게을렀고, 칭찬하기보다는 부러워했고, 이해하기보다 이해받기만을 원했고, 진지해지려는 순간에는 언제나 딴 소리나 실없는 농담을 내뱉으며 어색한 순간을 피하려 하는 친구였다.


결국 내게는 좁고 얕은 관계만이 남아 있고

어느 밤 술 한잔 하자 연락하고 싶어도 떠오르는 이름이 없는

번호를 알고 있지만, 그럴 수 있는 사이까지는 아닌 사람들 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건 아마도 내가 누군가 갑자기 연락할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 까닭일 것이다.

진지한 고민을 털어놓을 만한 사람이, 아무 때나 기분 좋게 만나 부담 없이 속내를 이야기 할만한 그런 사람이 못되는 탓일 것이다.


신기하게도, 나이가 먹어 갈수록 사람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점점 더 모르겠다.

특히 요즘에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겠어서, 조금도 내딛을 수가 없다.

섭섭함과 서운함은 점점 쉽게 느끼는데, 속깊은 생각과 호감가는 인품은 점점 멀어진다.

조심하려고 하는 게 멀게 느껴지거나, 격의 없이 대하려고 한 것이 과하게 느껴지거나


그 모든 건 순전히 나의 과오일지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친구가 필요하다.


혼자할 수 있는 게 많아졌지만, 굳이 혼자하고 싶지는 않은 일들이 투성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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